
스타 이즈 본
라비유하 - 모노
* 자살 소재가 있습니다.
“너, 또 술 마셨어?”
“아니, 아니… 나 괜찮아, 정말.”
유하는 저를 붙잡고 표정을 찌푸리는 매니저를 보며 작게 웃었다. 그의 성격은 까다롭고 예민해 부드러운 표정으로 웃는다는 게 곧 술에 취한 걸 알려주는 꼴이었다. 매니저는 한숨을 쉬었다. 누구나 꿈꾸는 최고의 스타. 유하는 연예인 중에서도 가장 큰 무대에서 홀로 설 정도로 잘 나가는 가수였다. 그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도, 이름을 모르는 사람도 없을 정도로 뛰어난 음악 실력에 작곡 실력까지. 모두가 아무런 문제없이 잘 나갈거라 생각하는 이였지만 그에게는 가장 큰 흠이 있었다. 유하는 제 앞에 잔뜩 놓인 술병을 손으로 밀어냈다. 별 힘없이 밀어낸 병인데도 바닥으로 떨어져 쨍그랑 소리를 내는 병에 매니저는 부축했던 유하를 소파에 눕혀두고 깨진 병으로 향했다. 자신이 맡은 가수가 아무리 인기 많은 가수라고 해도 돌아오면 저 꼴이니 그가 달갑게 보일리가 없었다. 돈 때문에 일한다는 말이 거짓이 아닐 정도로 매니저는 그의 행동이 달갑지 않았다. 까다롭고 예민하긴 해도 천성이 나쁜 사람은 아니다. 지독한 알코올 중독자일 뿐이지 사람을 때리거나 괴롭히지도 않고 거하게 취한 날이면 다음날에 사과의 말과 함께 챙겨주는 게 더 많았으니 돈이 부족한 날이면 그가 술을 더 먹지 않는지 기대가 될 정도였다. 매니저는 조각난 병을 모으며 유하를 바라보았다. 이는 저 사람 때문에 고생한 것에 대한 이기적인 생각이라면 저는 그를 꽤 진심으로 걱정했다. 제정신을 유지하는 게 힘든 거겠지. 까다롭고 예민한 사람, 이라는 표현은 그가 정신적으로 꽤 불안한 사람이라는 말이기도 하였다. 가수가 되고 싶어서 된 걸 텐데. 앞으로도 노래를 부르며 살아가려면 지금처럼 살다가 좋을 게 없다. 그렇긴 해도 도저히 그를 말릴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술을 그만 마시라고 해도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숨기거나 따라 다니며 뺏어도 어디서 어떻게 찾았는지 꼭 술을 입에 대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전부 한 것과 다름 없었다. 중독자가 괜히 중독자는 아니지… 모아둔 병조각을 천에 조심스럽게 감싸 버린 뒤, 매니저는 이불을 가져와 그에게 덮어 주었다. 내일은 멀쩡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
“미안해요, 내가 또…”
“신경 쓰지 마요. 늘 있는 일이잖아.”
“그게 문제라는 거야. 늘 있는 일이면 안 되는데. 진짜 미안해요.”
그걸 알면 병원이라도 다니지. 매니저는 몇 번이고 제게 고개를 숙이는 유하를 바라보며 멋쩍게 웃어보였다. 병원을 권유하는 일도 몇 번 있었지만, 달라진 게 없는 건 똑같았다. 평소처럼 차에 타며 미안하다며 쥐어주는 돈에 매니저는 제 머리를 긁적였다. 당연히 싫은 건 아니다. 속물적인 사람처럼 보여도 상관없었다. 그러니 돈은 받겠지만, 정말 순수한 걱정을 담아 그만 마시라는 말을 슬쩍 건네었다. 역시나 아무런 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며 매니저는 고개를 돌려 이번 무대가 놓인 장소로 향하였다. 차를 이동하는 동안 그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무대에 서기 직전, 술을 마시지 않으면 유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냅다 술을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신경 쓰지 않는 게 전부였다. 평소 같은 하루, 평소 같은 일정, 평소 같은 행동. 마지막까지 변함없는 하루였으면 달라질 만한 게 있었을까.
“잠깐, 잠깐 멈춰 봐요.”
“네?”
“차 좀 멈춰 봐!”
매니저는 다급하게 들려오는 유하의 목소리에 놀라 차를 멈춰 세우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유하의 움직임이 더 빨랐는지 이미 차에서 내려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얼굴도 가리지 않고 무슨 일이야! 생각과 동시에 매니저는 모자와 코트를 들고 그를 뒤따라갔다. 유하의 발걸음은 한 공원을 향하고 있었다. 저는 운전을 하느라 못 봤다고 하지만 유하는 어떻게 본 걸까? 아니, 어떻게 들은 걸까? 공원 안에는 사람들이 몰려 있고, 중앙에는 한 사람이 기타를 붙잡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감미로운 연주에 얹어지는 목소리. 이 노래를 들었다면 누구든 발걸음을 멈췄을 음악이라는 건 노래를 잘 몰라도 알 수 있었다. 유하는 차를 타고 이동하는 와중에도 이 목소리를 어떻게 듣고 그에게 향했을까. 그날은 유하가, 그리고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라비가 처음으로 만난 날이었다.
*
“라비. 그 노래, 기억해요? 공원에서 라비가 불렀던 노래.”
“그거? 당연히 기억하지. 어떻게 잊겠어?”
유하는 제 말에 쑥스러운 듯 답하는 라비의 손을 붙잡았다. 공원에서 그를 처음 만나고, 그를 데리고 와 제 무대에 세운지 일주일이 흐른 뒤였다. 처음 보는 사람을 무대에 세우다니, 평소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아무도 유하를 말리지 못했다. 그가 보는 눈은 정확하기도 했고, 지금까지 동업을 하면서 처음으로 부리는 억지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제 눈이 틀렸다면 모든 건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말도 라비가 무대에 서는데 한 부분을 차지했다. 당연히 같이 끌려나온 이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처음 보는 악보를 쥐어주며 같이 부르자는 말마저 현실인지 알 수 없을 노릇이었다. 그치만, 겨우 공원에서 노래 부르던 무명의 가수 손을 이 세상 가장 인기 있고 뛰어난 가수가 제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자고 하고 있다. 꿈이 있다면 거절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라비는 제 스스롤 믿었다. 그리고 마치 운명을 만난 사람들처럼 두 사람이 부른 노래는 빠른 속도로 유명세를 탔다. 그뒤로 정말 많은 게 변하였다. 유하는 제 무대에 꼭 라비가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고 두 사람이 듀엣을 하는 무대도 필수적이었다. 같이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면 이번 무대는 나가지 않겠다는 말마저 할 지경이니 그 누구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날, 유하가 라비한테서 무얼 봤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가장 노래를 잘 하는 사람,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 가장 곁에 있고픈 사람. 단순히 첫눈에 반했다는 말만으로 부족한 감정을 품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그게 무엇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짧은 기간인데도 두 사람은 어느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무대를 만들어 냈고, 가장 중요한 건 라비를 만난 뒤부터 유하가 술을 마시는 날이 급격하게 줄었다는 부분이었다.
“이번에 그 노래를 부를 거야. 어때? 같이 불러줄 거죠?”
“뭐? 그건 그냥 내가 가볍게 작곡한 노래잖아. 그걸 꺼내겠다는 거야?”
“그건 내가 가장 사랑하는 노래죠. 라비랑 내가 같이 부를 수 있도록 곡을 만지느라 늦어졌어요. 난 지금 당장이라도 이 노래를 부르고 싶어요.”
“나야 유하랑 부르는 노래는 어떤 노래라도 좋지만… 진짜 괜찮겠어?”
“괜찮을 거예요, 우리. 언제나 그랬잖아요.”
유하는 붙잡고 있던 그의 손을 제 쪽으로 당겨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 행동에 라비는 결국 웃으며 유하를 제 품에 끌어 안았다. 완벽한 파트너이자 사랑스러운 연인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비밀스럽게 연애를 한 모양이지만,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는 모습에 오히려 연인이 아닌 게 의심스런 일이었다. 그들 사이에 반지를 낀 손이 나타난 건, 그들이 처음 만난 이후 한 달 뒤의 일이었다. 매니저는 다정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그들을 보며 앞으로도 많은 게 달라질 거라 생각했다. 정말로 많은 것들이.
*
“유하, 이것 봐! 날 캐스팅 하고 싶대.”
“그래요…?”
“응? 별로 기쁘지 않은 거야?”
“아뇨, 아니에요. 그냥, 조금… 우리도 일단 계약을 맺긴 했잖아요?”
“그거야 그렇지만, 그건 회사보다는 우리끼리 맺은 계약이었으니까. 이쪽이 좀 더 본격적인 느낌이 들지 않아? 나도 내 개인활동을 할 수 있고!”
“…라비가 기뻐보여서 저도 좋아요.”
우리 둘만으로도 분명 괜찮았는데. 유하는 라비의 품에 안긴 채 작게 중얼거렸다. 라비가 작곡을 하고, 유하가 편곡을 했던 듀엣 노래가 흥한 건 지금 와서야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사랑스러운 연인이 마주하며 부른 노래가 그 어떤 노래보다 심금을 울렸다는 평조차 뻔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니 지금은 행복에 겨웠다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타이밍이었다. 그날 유하는 지금의 제 연인에게 첫눈에 반했으나 단지 그것만으로 그를 데려온 게 아니었다. 사랑스러운 사람, 처음으로 갖고 싶었던 존재, 그리고 제 곁에 영영 가둬둘 사람. 무명의 가수가 저의 인기를 통해 유명해진다고 해도 결국 제 곁에 머물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제 곁에만 머물게 하면 된다. 유하는 이때까지 라비에게 들어온 캐스팅 제안을 모두 제 선에서 거절했다. 저의 것인데 보낼리가 없잖아요, 하고 속으로 말하며 그들을 전부 되돌려 보냈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그가 혼자 있을 때를 노려 얘기를 나눈 걸까? 유하는 그의 등을 쓸어 내리며 그가 떠나지 않을 방법을 고민해야만 했다.
*
그러니 이건 정당방위다. 나한테만 빛날 존재여야 했고, 내 곁에만 있어야 했다. 사랑한다는 말은 나에게만 들어야 했고, 나에게만 해줘야 했다. 팬? 상? 그런 거 알게 뭐람. 유하는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라비. 너한테 중요한 건 나와 꾸미는 무대 하나여야 했어. 미친 사람이라 손가락질 해도 상관없다. 이는 제 곁을 떠나려고 했던 라비의 탓이다. 제 손에 닿지 않을 정도로 높은 무대에 오른 라비의 탓이다. 오늘처럼 술을 마신 게 언제적 일인지 벌써 가물거린다. 이런 옷이 그에게 어울릴 것 같아? 이런 무대가 그를 빛나게 해줄 것 같니? 다 너희의 망상이고, 오만이다. 전부 다, 너희의 탓이다.
엉망이 된 무대의상과 장치들 속에 술에 취한 채 발견된 유하가 결국 병원으로 향하는 일은, 어쩌면 언젠가 일어날 일인지도 몰랐다.
*
유하는 둥글게 앉은 사람들 속에서 고개만 대충 까닥거렸다. 질투심에 눈이 멀어 라비가 무대를 서지 못하도록 막은 일이 들통난 건 이제 옛날과 같은 일이었다. 단순히 무대를 망친 수준에 끝나지 않고 조작된 사고까지 낼 계획이 들키자 이는 범죄나 다름 없다는 여론이 널리 퍼졌다. 그 누구보다 유명하고 뛰어난 가수가 무너지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그만큼 그가 잘못한 일이지만, 상당히 많은 돈과 인맥을 이용해야 했고 사죄의 글과 함께 그나마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걸로 끝난 사건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바로 유하가 병원에서 퇴원을 하는 날이었다. 제가 저지른 죄는 알고 있다. 여전히 그가 제 곁에 남아있길 바라지만, 마지막으로 본 모습이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린 모습인데 그가 여전히 저를 사랑하고 있을 거란 자신이 들지 않았다. 그탓에 간간히 들려오는 라비의 소식도 접하지 않았다. 보기 싫기도 했고, 볼 수 없기도 했다. 그동안 유지되었던 제 유명세가 우습기라도 한 것처럼 라비는 제 생각보다 더 유명해진 상태였다. 오늘 저를 보러 오지 않아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여전히 제 손가락에 머물고 있는 반지를 매만졌다. 그러지 말아야 했다. 그렇지만, 그치만…
“유하!”
후회와 절망, 걱정과 함께 밀려드는 미안함을 전부 잊은 채 유하는 제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는 라비를 끌어 안았다. 지금 이 순간 가장 행복한 사람은 바로 자신일 것이다. 그가 제 곁을 떠나지 않았다. 미워하고 원망해도 변명조차 할 수 없는 저의 곁에 남아주었다. 행복감을 뒤로 하고 유하는 라비를 붙잡은 채 눈물을 흘렸다. 아무리 행복하다고 해도 미안한 감정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저는 사죄를 해야만 했다. 그날 전하지 못했던 사과를.
“미안해, 라비. 내가 널 망쳤어… 전부 내 탓이야, 내가… 그러면 안됐어…”
“유하… 네 탓이 아냐. 난 괜찮아. 정말이야.”
“널 발견하지 말아야 했는데… 널 이곳에 데려오지 말았어야…”
“나를 봐, 유하. 내 말을 믿어. 난 널 처음 본 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어. 지금도 충분히 행복해.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지 마.”
라비는 울음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붙잡고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 웃음에 거짓이 없다는 건 유하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의 품에 안겨 한참이나 엉엉 소리를 내며 운 다음에야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병원을 나섰다. 라비의 손에도 여전히 둘이 맞춘 반지가 자리잡고 있었다.
*
유하의 매니저는 제 생각대로 정말 많은 게 변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사건이 있었지만, 빠른 수습과 큰 돈을 들인 만큼 대중들 사이에서 점차 잊혀지는 사건이 되었고 과거의 화려함만을 찾아 유하를 부르는 이들도 간혹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퇴원을 한 유하의 모습이 지금까지 지내온 모습 중에서 가장 행복해 보이는 걸 알고도 그를 억지로 무대에 내세울 생각은 아니었다. 어차피 예전처럼 가장 큰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유하도 나름대로 지금의 삶에 만족해 보이니 둘만의 시간을 보내게 하는 게 분명 맞는 일이겠다 싶었다. 내버려두자. 아무도 두 사람을 방해하지 말자.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드는 건 오로지 유하의 매니저 뿐이었다.
*
라비는 제 품에 안긴 유하를 보며 장난스럽게 속삭이듯 말하였다. 퇴원 후 그들이 돌아온 건 유하의 집이었다. 유하 혼자서만 살던 집에 라비가 같이 살게 되고, 두 사람의 물건과 추억으로 꾸며진 집은 유하가 병원에 입원하게 된 후 아무도 발을 들이지 않았던 곳이었다. 라비는 일과 함께 밖에서 지내며 제 연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같이 집으로 들어온 날, 집은 또다시 두 사람만의 물건과 추억이 쌓이고 있었다. 눈을 뜨면 차가운 벽이 아니라 따스한 연인의 품이 보인다. 이대로 모든 게 괜찮아지겠지.
“이번에 월드투어를 하게 됐어. 유하도 같이 무대에 서줄래? 오랜만에 같이 노래 부르자.”
“라비, 신경 써주는 건 고맙지만 난 괜찮아. 난 더 이상…”
“눈치 보는 거야? 그러지 않아도 돼.”
“그렇지만 내가 어떻게 다시 무대에 서겠어? 아무도 원하지 않을 거야.”
“내가 원하잖아. 난 너와 다시 노래를 부를 날을 기대하고 있었어. 아, 기다려 봐.”
누워있던 몸을 일으킨 라비가 곧장 피아노로 향해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다. 음 하나와 전해지는 노래 가사가 저를 향한 메세지라는 건 곧장 알 수 있었다. 유하는 들려오는 음악을 따라 불렀다. 그의 곁으로 가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일도 잊지 않았다. 영원할 수 있는 순간이 있다면 분명 지금일 거란 생각도 들었다. 라비는 저를 따라 노래를 부르는 연인을 바라보았다. 분명 잘 될 거란 말도 잊지 않았다.
“오늘 내 무대에서 이 노래를 같이 부르는 건 어때?”
“아하하, 너무 뜬금없잖아. 라비, 나는…”
“아니, 난 기다릴 거야. 와줄거지? 기다리고 있을게.”
이제 나갈 시간이라며 가방을 챙기면서도 기다릴 거야. 알았지? 라며 몇 번이고 말하는 모습에 유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어보였다. 정말 괜찮을까. 그가 연주했던 피아노와 악보를 들고 유하는 한참이나 고민에 빠졌다. 당사자가 아무리 괜찮다고 해도 모든 게 용서가 되는 건 아니었다. 퇴원을 하긴 했어도 전과 다른 제 몸상태도 분명 알고 있다. 라비와 함께 노래를 불렀던 순간들은 분명 행복했지만… 딩동, 눌리는 벨소리에 유하는 고민을 멈추고 문으로 향하였다. 라비라면 직접 문을 열고 들어올 테고, 저의 매니저에게는 일을 관둔다고 말했으니 떠오르는 사람은 몇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벨을 누른 건 바로 라비의 매니저였다. 유하는 그의 모습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라비를 캐스팅한 것도 저 사람이었고,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을 만한 노래만 골라 부르게 한 일도 저 사람이었다. 그러니 유하에게 있어 결코 달갑지 않은 상대였다. 이대로 문을 열지 않고 보내고 싶지만, 라비가 두고 간 물건이 있을지도 모른다. 대놓고 심기가 불편한 표정으로 유하는 그를 마주하였다.
“무슨 일이세요?”
“이제 그만 놓아주지 그래요?”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유하는 상대가 제게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기에 되묻는다. 이해를 구하기 위해 되묻는 게 아니다.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라는 걸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다짜고짜 찾아와서 아무런 설명도 없이 내뱉는 건 헛소리나 다름없다. 애써 다음으로 이어질 말을 기다릴 필요도 없다. 유하는 문을 닫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여기 온 목적이 그뿐이라면 이제 돌아갈 일만 남은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눈치가 있는 사람은 아닌지, 아니면 그처럼 알고도 말을 멈추지 않는 것인지 멍청하게도 제 할 말을 이어간다.
“라비는 겨우 그 정도에 만족할 그릇이 아냐.”
“그 사람이 그렇게 말했나요?”
“라비의 의견은 아니지. 그렇지만 알잖아. 네 꼴이 어떤지.”
“그 사람이 한 말이 아니라면 듣지 않아요.”
멍청하고 무례한 사람. 유하는 그를 노려보듯이 바라보았다. 그가 말을 걸었다는 걸 안 순간부터 멀리 뒀어야 했다. 라비의 곁에서 가장 멀리 두고, 그의 말은 듣지 말라고 해야 했다. 유하는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 그를 밀어내고 문을 닫았다. 제 생각을 안다는 듯이 상대는 개의치 않게 코웃음을 치며 자리를 떠났다. 그는 왜 매번 우리 사이를 망치려 드는가. 그는 저의 것이다. 제가 그를 발견했고, 그가 빛을 보게 하였다. 그렇다면 제 손에 쥐고 있는 게 뭐 어때서. 우리는 사랑을 하고 있다. 그 사랑에 방해되는 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유하는 알고 있다. 우리 사이를 방해하는 게 어떤 건지. 치료를 받았다고 근본이 달라지지 않는다. 유하는 본래부터 그런 이였다. 까다롭고 예민한, 정신적으로 불안한 사람. 또다시 술에 빠져 사고를 칠 테고, 라비의 앞길을 막을 테고, 형편없는 사람이란 이야기를 듣겠지. 라비의 연인이 그의 앞길을 방해한다는 말이 평생 그를 따라다닐 것이다. 그때까지도 라비가 저를 사랑해서 무대를 버리고 제 곁에 남아줄까. 제 연인은 앞으로 나아갈 줄 아는 사람이다. 그가 뒤를 바라보는 건 제가 나아가지 못하고, 서 있기 때문에. 유하는 알고 있다. 끔찍할 정도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앞에 서서 기다리는 건 제가 아니었다.
기다리겠다고 말하던 라비의 모습이 떠오른다. 모든 게 괜찮을 리가 없다고 누군가 속삭인다. 유하는 이 목소리를 잘 알고 있다. 어쩌면 좋지, 라비. 너를 계속 기다리게 할 지도 몰라.
*
“오늘 저의 무대는…”
라비는 말을 하다가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제 품에 있는 기타는 오랜만에 꺼내 처음으로 무대에 오르는 기타였다. 그를 처음 만났던 날 노래를 부르며 연주했던 기타였다. 유하는 그날 저를 보며 빛을 보았다고 말했었다. 과분한 칭찬이라 답하였으나 유하는 그저 웃어 보였다. 그건 정말 빛이었어. 너에게 다가갈수록 들뜨는 감정을 감출 수가 없었어. 나에게는 너만 있으면 될 것 같다고 느껴졌어. 그가 하는 말이 과장스러운 말이 아닌 건 확실했다. 그만큼 유하는 라비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라비는 쑥스럽게 웃으며 저도 그랬다며, 유하가 무대로 이끌던 길이 단순히 조명 때문에 밝게 느껴진 게 아니라 마치 제 앞날이 앞으로 빛날거라 말해주는 듯 했다며 답하였다. 이제는 제 품에만 남긴 기억이었지만. 라비는 제 입술을 깨물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길래 유하가 죽은 채 발견되어야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차라리 사고를 당했던 거라면 연인의 죽음에 납득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는 누가봐도 제 스스로 목숨을 끊은 모습이었다. 오늘은 유하를 추모하기 위해 꾸민 무대였다. 이제 그를 기억하고 추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알 수 없으나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가 떠난 날, 같이 부르자고 얘기했던 노래는 저 혼자 불러야만 했다. 밝게 빛나는 조명 아래, 네가 나를 빛처럼 바라보고 너와 가는 길이 빛인 줄 알았던 그때가 이렇게도 먼 순간이었던가. 라비는 이어지지 못한 말을 억지로 이어가지 않고 그저 제 앞에 놓인 마이크를 붙잡았다. 이 노래가 제 연인에게 닿기를, 오로지 그것만을 바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