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킬러의 보디가드
리안 로미티 X 라일라 피츠 - 화우
전 대통령 ……의 재판에서 피해자들의 격한 증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 측 변호인은 정적들의 거짓말이라고 일축하고 있습니다. / 세계 최악의 독재자가 대규모 인종 청소로 기소됐습니다. / 재판소는 유례없는 보안 조치를 취하며 도시 상공까지 폐쇄했습니다. / 하지만 증거 부족으로 공소 유지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 그 많던 증인들이 모두 자취를 감췄습니다. 증거와 함께 증언대에 나타날 용기 있는 사람은 없는 걸까요?
리안은 틀어놓았던 텔레비전을 껐다. 딱히 용기가 있어서 증언을 결심한 건 아닌데. 씻고 나와 물이 뚝뚝 떨어지는 금색 머리카락을 수건에 털며 리안이 중얼거렸다. 용기 같은 건 애초에 갖고 태어난 적이 없다. 굳이 따지자면 인터폴의 ‘로미티 씨, 이렇게 제안하죠. 증언해주시면, 수감 중인 여동생을 완전히 사면하겠습니다.’라는 말에 넘어간 거다.
또는 그저 착한 일을 하고 싶었던 지도 모른다. 죽지도 늙지도 않는 어린 몸으로 오래 살았다. 리안은 엉망진창인 인생을 조금씩 바로잡으려 노력한다. 십오 년 전, 핸들러를 떠난 것도 그런 이유였다. 부, 권력, 명예… 왜 세 가지를 동시에 갖고 싶어 하는 건지. 리안은 아직도 잘 이해 가지 않았다. 살인을 업으로 삼았으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는 건 조금 우스꽝스럽지만.
하지만 역시 라니아를 사면한다는 말에 넘어간 게 맞는 것 같다. 당장 그 리안 로미티가 감옥에 가게 되었던 것도 그녀 때문이고, 리안 스스로 생각해도 그의 약점은 물과 여동생뿐이다.
“난 널 이용한 적 없어!”
바깥이 시끄럽다. 씻는 사이 디에고가 불렀다는 믿을만한 외부인이 온 모양이다. 리안은 귀를 바짝 세웠다. 대화로 들어봐서는 전 여자친구라도 되는 모양인데… 상당히 재밌는 치정극이다.
솔직하게 말해, 리안은 아무도 없는 쪽이 편하다. 당장 인터폴 요원들만 봐도, 재판소까지 데려간다고 말하고는 내부의 배신으로 인한 기습 하나 못 이겨서, 바깥에 있는 디에고를 제외하곤 전부 죽어버렸지 않은가. 하지만 혼자 가면 분명 또 그걸 트집 잡아 약속을 어길 게 뻔하다. 누구라도 상관없으니 튼튼한 사람이길 바라며 리안은 문을 열었다.
“누구길래…”
“이런 미친…”
낯익은 얼굴이다. 낯만 익은 게 아니다. 리안은 반갑게 웃으면서, 제 목을 겨누는 총을 쳐냈다. 총탄은 벽 뒤를 때렸다. 리안은 최대한 조심히 상대의 손목을 비틀었다. 상대는 총을 떨어트렸지만, 곧장 망설임 없이 얼굴을 걷어차기 위해 발을 날렸다.
“우리 말로 하면 안 되나?”
“죽은 후에 실컷 말해. 내가 널 개먹이로 던져주려고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기왕이면 고양이 먹이로 해. 나는 개보단 고양이가 좋아.”
피하자마자 연이어 갈비뼈를 때려오는 힘이 강했다. 옆으로 비틀거리면서, 리안은 빠르게 끝내기 위한 기회만 찾았다. 진심으로 싸우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없다. 그리고 다음 순간 리안은 라일라의 손목을 잡고 확 끌어당겨서 균형을 무너뜨렸다.
발악하는 라일라의 어깨를 눌러 바닥에 단단히 고정한 후, 리안은 뒷주머니에서 꺼낸 칼로 재빨리 라일라의 팔목을 칼로 그었다. 얕은 상처를 통해 피가 확실하게 보였다. 그것이 상대를 아직 아이로 보기 때문에 하는, 어릴 때 훈련을 더 시키기 귀찮은 나머지 피를 봤으니 끝난 거라고 말하며 하던 행동의 반복이란 걸, 라일라는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이를 갈았다. 개자식. 잠잠해진 라일라의 뒤를 바라보다, 리안은 안타깝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은 못 이기는 걸 알잖아, 라일라.”
겨우 한숨을 돌리는데, 목이 따끔거렸다. 낯익은 느낌이다. 리안은 고개를 돌려 뒤쪽으로 서 있던 디에고를 보았다. 총? 아니, 그냥 총이 아니라… 리안은 생각을 마치기 전에 고꾸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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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이 끝나면 디에고를 죽여야지.’
라일라는 방금 또다시 결심했다. 옆에 앉은 리안은 그것도 모르고 그저 하던 말을 계속했다. 그래서 라니아가 내게 제안했지… 깨어난 지 얼마 안 되어 갈라진 목소리지만, 라일라에겐 그편이 차라리 듣기 편하다 느껴졌다. 라일라가 좋아했던 리안은 이 모습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그 시절을 그리워하게 되는 건 아니다. 그런 멍청한 짓을 하는 건 리안이지, 라일라가 아니다. 짜증 나서 돌린 시선에 창 너머로 ‘27번 국도’를 알리는 표지판이 잡혔다. 마음에 안 드는 숫자다.
27, 라일라가 리안을 죽이려다 실패한 횟수다. 카나리아 가면을 쓰고 다니는 청부업자를 트리플A 경호원이 죽이려 한다는 말을 들으면 보통 사람들은 반대가 되어야 한다 생각하지만, 그 청부업자가 배신자라는 걸 알고 나면 반응이 달라진다. ‘그래도 죽이는 건 아니지.’ 같은 착해빠진 반응도 있지만, 라일라 주변의 대다수는 성공을 빌어준다. 그러니 오늘도 라일라는 리안을 죽이려 했다. 5시간 전, 리안의 칼에 27번째 베인 손목이 괜히 따끔거린다.
“그래도 나를 만나 반갑지 않아?”
리안은 꼭 라일라의 생각을 알아챈 듯이 웃으며 말한다.
“지랄도 정도 것이지.”
그새 기분이 괜찮아졌나 운전하는 그녀에게 붙어오는 리안을 밀쳐내며 라일라가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부정하지는 않아, 리안은 기분 좋게 흥얼거렸다. 이번에 라일라는 속으로 중얼거리지 않았다.
“역시 죽여야 했어.”
라일라 피츠는 유능한 경호원이다. 몇 없는 트리플A. 범죄의 대모, 핸들러의 자랑. 유일한 딸. 무슨 수로든 완벽하게 임무를 해냈다. 빌어먹을 과거형이다. 단 한 번의 실수로 와르르 무너졌고, 지금의 그녀는 그저… 방치되어 있었다.
알고 있다. 말한 놈이 멍청이지. 상대가 믿을 구석 없는 돌대가리에 몸밖에 없는 인터폴 새끼인데 말한 자신이 멍청이지. 뭘 믿고 싶던 건지 모른다. 그따위 사랑에 눈멀어 감옥에 처박힌 멍청이들을 그렇게 봐놓고도! 근신하라는 명령에 악을 지른다고 해결되는 게 없다. 라일라는 침착해지려 노력했다. 이대로 버려지는 건 안 된다. 그렇게 될 바에는 어머니의 자리를 자신이 탈환하는 쪽이 차라리 옳다. 언젠가 쓸모없어지면 버려질 거란 생각은 기억도 못 할 만큼 어린 시절부터 해왔다.
그리고 마침내 핸들러가 정말로, 그 딸을 버리려 한다는 정보를 듣자 라일라는 결심했다. 그녀는 핸들러에 대해 안다. 속은 것이 더 많겠지만, 그 정도야 용서할 수 있을 정도로 핸들러의 비밀을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무시했을 디에고의 연락도 라일라는 받았다. 이용할 수 있는 건 전부 이용해야 한다. 디에고라고 예외가 되진 않는다. 이용하고 밑바닥까지 떨궈 버리자.
“모든 걸 피로 해결하려는 건 나쁜 버릇이야, 라일라.”
그래서 저딴 소리를 하는 놈을 경호하는 일이라도 아예 안 반갑다곤 못하는 거다. 라일라 그녀보다 더 오랜 시간을 어머니 곁에 있다가 도망가버린 놈이다. 온갖 인간들의 약점을 팔며 형량을 거래하고 있는 놈이다.
“당신이 가르쳤잖아.”
“내가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후회한다는 말도 했던가?”
“무슨 욕을 할지 생각할 시간에 칼을 한 번 더 휘두르라는 소리나 했지.”
“괜찮게 가르쳤네.”
정말로 자랑스럽게 여기는 목소리였다. 바로 뒤이어 날아온 총탄에 뒷유리가 깨지지만 않았어도 라일라는 빈정댔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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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말로도 멀쩡하다고 말하긴 힘든 꼴로 암스테르담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탔다. 인터폴을 무능하다고 말하는 리안에게 라일라는 드물게 동의해줬다. 정보가 어떻게 샜길래, 온갖 놈들이 다 쫓아오냔 말이다.
꼭대기로 올라가기 전, 리안은 배 안 매점에서 자동차 폭발로 인한 약한 화상에 대기 위한 얼음주머니를 사 왔다. 쓰라린 통증이 조금은 나아지는 것 같았다. 덤으로 산 풍선껌을 씹으며 라일라가 트집을 잡았다.
“당신은 그딴 게 없어도 되잖아.”
“고통을 내버려 둘 필요도 없지.”
가능한 바다를 안 보기 위해 난간에서 돌아선 채 리안이 답했다. 이미 세포부터 조금씩 회복되고 있는 게 보인다. 나쁘지 않은 침묵이 이어지다 라일라가 말했다.
“처음 당신을 봤을 때, 엄마가 고용한 남창인 줄 알았어.”
“…어?”
갑작스러운 얘기에 리안은 순간 들고 있던 얼음을 떨궜다. 난간 사이로 굴러간 주머니는 1층까지 떨어졌지만, 다행히도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내가 잘생기고 젊긴 하지만, 그런 오해는 너무하지 않아?”
“욕실 밖에서 달달 떨며 답하다가 엄마가 부르니 들어가서 우는 걸 보고 그럼 뭐라 생각해?”
“아니… 그렇게 말하니까 이상하게 들리잖아….”
저리 보니 정말 희롱당한 어린 남창 얘기 같아서, 리안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놈의 몸이 문제지. 파이브처럼 열셋은 아니란 게 다행인 유일한 부분이다.
“그러고 얼마 안 가서, 당신이 사람 죽이는 걸 본 거야. 불필요할 정도로 난도질을 하더라고.”
“오해도 풀렸겠네.”
“뭔 소리야. 몸도 팔고, 사람도 죽이니, 쓸모가 많아서 데리고 있구나 생각했지. 딱히 틀린 건 아니잖아.”
리안이 착잡함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파이브의 경멸 어린 시선이 저거였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라일라가 비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정말 당신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배신에 관해 묻는 거였다. 라일라는 그녀보다 먼저 핸들러에게서 등을 돌린 사람에게 그 기분에 대해 묻는다. 라일라 본인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택하는 게 아닌데도 말이다. 리안은 여전히 진지하지 않은 목소리로 답했다.
“글쎄다. 꼭 되어야 하나?”
옅은 회색 눈동자가 라일라를 응시했다.
“나는 내 인생을 고쳐보려 애썼을 뿐이야. 앞으로 살날이 많은데, 계속 쫓길 수는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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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적으로 갈라진 건 아니다. 암스테르담에서 내려, 안전 가옥으로 들어갈 때까진 좋았다. 추적되지 않는 핸드폰을 하나 주머니에 집어넣고, 깨끗하게 씻고 피가 이리저리 굳은 옷도 갈아입었다. 살짝 커서 앞이 헐렁한 옷에 리안은 ‘핸들러는 슬랜더를 좋아했던 것 같은데, 확실히 모녀라도 취향은 다른 건가.’ 같은 소리를 했다가, 그대로 고막을 잃을 뻔했다.
그리고 리안 로미티가 튀었다. 말 그대로 튀었다. 어디로 갔을지야 뻔했다. 라일라가 열받은 부분은 그 자식이 도망갈 게 뻔한데도 잠깐 방심했던 데에 있다. 놈은 라일라가 예상한 곳에 있었고, 전화를 피하지도 않았다.
“라일라, 시계탑에 올라와 본 적 있어?”
블루투스 이어폰은 처음 사용해보는 탓에 리안의 목소리는 들쭉날쭉하게 울렸고, 라일라는 귀를 찌르는 소리 때문에 잠시 핸드폰을 멀리 두었다.
- 시끄럽고 내려오기나 해.
리안은 시계탑 아래로 작게 보이는 라일라에게 손을 흔들었다. 끌고 온 차가 훔친 건지, 아니면 가지고 있던 건지 리안은 궁금했다.
- 눈에 띄지 말라고 내가 분명 말하지 않았나?
“하지만 꽃 정도는 두고 가는 게 예의잖아.”
모처럼의 방문인지라, 라일라가 화낼 걸 알지만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너머로 감옥이 보이는 이곳을 얼마나 자주 왔었는지 모른다. 흰 국화도 바쳤으니, 슬슬 아래로 내려가려는데 리안의 눈에 이상한 게 잡혔다.
“오, 이런…”
- 젠장.
라일라도 알아챈 모양이었다.
“분명 다섯은 목을 꺾었는데. 대체 몇 명이나 온 거야?”
- 그냥 뛰어내리기나 해. 어차피 안 뒤지잖아.
“하지만 그거 정말 아파! 전신의 뼈가 부서지는 기분을 알아?”
- 그것도 모르는 놈이 이 업계에 몇이나 있다고. 뛰어내리기나 해!
“싫어!”
마땅히 반박할 게 없어 리안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그렇지만 정말로 뛰어내리는 것만큼은 싫다.
“안 죽는다는 걸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 고통이 사라지고도 남는 정신적 충격에 대해서도 좀 생각해주면 안 될까?”
- 재잘댈 시간에 내려오라고! 고작 네 시간 남았어!
“노력하고 있어!”
노력이 성과를 보인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이미 계단 위에 기어 올라온 놈들이 보였다. 핸드폰 너머가 시끄러운 걸 보아 라일라 쪽에도 잔뜩 붙은 모양이다. 차가 빠르게 질주하는 소리가 들린다. 먼저 가기로 한 건가? 현명한 선택이다.
“라일라, 어릴 때의 카페를 기억해?”
답이 돌아오지 않지만, 리안은 라일라가 기억하고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다.
“꽃이 피는 날이었지. 훈련 같은 따분한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아서, 밖에 나왔잖아. 그곳에서 만나자.”
제일 먼저 달려드는 놈의 머리를 잡고 무너뜨려 그 손에 든 총부터 뺏었다. 남자를 방패 삼은 채, 이어 보이는 놈들의 목에 정확하게 쏴 넣으면서도 리안은 나긋나긋하게 계속 말했다. 리안은 말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귀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싫다. 뭐라도 말해야 했다.
시계탑 아래로 내려온 리안은 단번에 라일라를 찾을 수 있었다. 차끼리 서로 들이박고, 경보등이 시끄럽게 울린다. 리안은 자신보다 라일라 쪽에 붙은 놈들이 더 많다는 걸 알아챘다. 조금 더 자세히 보니 인터폴까지 붙은 모습이다. 인터폴.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있었다.
“디에고와는 어떻게 만났어?”
리안은 상황에 맞지 않는 질문을 했다. 어차피 저렇게 달려들어도 라일라가 이긴다는 믿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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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널 감당할 사람은 없으니, 디에고와 다시 합치는 게 좋지 않을까.”
리안은 무례한 참견을 망설이지 않았다. 어른이니 이 정도 말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리안은 전화 너머의 라일라가 뭐라도 답하길 기다렸다. 그 잠깐을 기다리지 못하고 쏴대는 총알이 뭐 이리도 많은지. 마지막 놈이 강 위에서 제대로 폭파한 걸 확인하고서야 리안은 느긋하게 약속한 공원 카페에 앉았다. 피범벅인 정장을 걸친 남자는 너무나도 눈에 띄지만, 지금 당장 더 쫓아올 인력은 저쪽에도 없을 테니 신경 쓸 게 없었다. 바리스타가 손을 덜덜 떨며 건네준 커피는 달짝지근한 게 입에 잘 맞았다. 수전증이 있는 모양이던데, 좋은 병원이라도 소개해줄까 생각하게 될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답해봐, 라일라. 그 남자 정도면 배신을 했다 하더라도 괜찮지 않아? 내 어린 조카도 나쁘지는 않다고 말했는데.”
리안은 다시 가만히 라일라의 답을 기다렸다. 전화 건너로 끔찍한 소음이 들리고, 리안은 아마 라일라가 지금 차로 건물에 박았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래서 답을 듣기는 어렵겠다 싶어 다시 입을 열어 하고 싶은 말을 했다.
“알듯이, 청부업자나 경호원이나 평범한 가정을 이루긴 힘들지.”
- 가정 이룰 생각 없거든, 시발! 왜 수가 안 줄어드는데!
결국 말을 듣다 못한 라일라가 먹이를 줬다. 뒤이어 들려온 총소리는 듣지도 못한 것처럼, 리안은 얼굴이 활짝 폈다.
“하지만 라일라, 가정이란 모든 이에게 행복이 되어줘. 아무리 못 배운 자라도 가정이 생기면, 성실해지는 법이야. 한스 라이오넬은 죄수들에게 가족을 만들어주면 더 효과적인 교화가 가능할 거라는 주장도 했지.”
피 묻은 정장을 보고도 별 반응이 없던 건너편의 손님이 반응했다. 시선을 알아챈 리안은 커피를 내려놓아 비어있는 한쪽 손을 들어 웃으며 인사해주곤, 계속 라일라에게 말했다.
“나 역시 핸들러와 함께한 시간을 가장 즐거웠어. 그녀와 결혼하고, 자식으로 너와 이브, 그리고 내 조카까지 들인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며 살았지.”
리안은 두 눈을 가볍게 감으며 회상에 빠졌다. 그 시절만큼 그리운 게 또 있을까. 배신하지 않았어도, 그는 계속 잘 지냈을 것이 분명하다. 귀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목소리도 때가 되면 사라졌을지 모른다. 허나 세상엔 사랑이 존재하는 걸 어찌한단 말인가.
“…난 라니아를 원망하지 않아.”
그 중얼거림까지 라일라에게 닿았는지는 모른다. 리안은 조금 더 떠들었다.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행동은 너무나도 즐거워 그만두기 어려웠다. 라일라는 간간이 욕설 섞인 답을 돌려줬다. 그러면 리안은 웃었고, 얘기는 더 길어졌다.
- 빌어먹을! 누가 경호원이고 누가 경호 대상인지 모르겠네!
신경질적인 라일라의 외침 뒤로 들려오는 소리는 없었다. 라일라가 쫓아오던 것들을 전부 따돌렸다. 굳이 소리가 아니더라도, 이미 아까 전부터 리안은 몸을 강가 쪽으로 돌리고 있었기에 알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만만할 뿐인 라일라를 우선으로 잡아 저를 끌어들이자고 결정했던 모양인데, 그게 정말 가능하다고 생각한 걸까. 평화로운 암스테르담을 박살 낸 자동차들의 폭파가 그저 우스꽝스럽다.
사이드미러는 형태도 안 보이는, 앞 유리는 조각나서 보이기는 하는 건지 의심스러울 뿐 생각보다 괜찮은 상태의 차가 덜그럭거리면서도 빠른 속도로 리안 앞에 멈춰 섰다. 리안은 정말 순수하게 감탄사를 뱉었다.
“지랄 말고 타기나 해!”
내릴 필요도 없는 창문 안에 라일라의 모습은 다친 곳 하나 없었다. 가까이서 봐도 같을 걸 알면서도, 리안은 옆자리로 재빠르게 올라타고 곧장 라일라부터 살폈다.
“트리플A를 괜히 단 건 아니네.”
어린애를 대하는 말투에 라일라는 리안의 목에 걸린 넥타이를 잡아 바짝 조이면서 경고했다.
“한 번 더 헛소리하면, 혓바닥을 뽑아서 넥타이로 만들 거야.”
“내가 무슨 얘기를 하든 사랑으로 들어주던 리리는 어디 갔는지 몰라.”
리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능청을 떨었다. 증언하러 가는 경호 대상의 혀를 정말 저렇게 만들 일은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취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재판소까지는 거리가 아직 남았고, 리안은 가는 내내 라일라에게 캐물을 생각이었다. 재판이 끝난 후에 밥이라도 같이 먹으면서 할 수도 있고. 어차피 조만간 탈옥이야 할 계획이니 시간은 많다. 리안은 그저 마냥 낙천적으로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