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피투게더 (춘광사설)
L×四月 - 엘프
울릴 리 없는 초인종이 울리고 문이 열렸다. 그 앞에는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는 한 사람이 서 있다. 그 사람은 내 어깨를 붙잡으며 말한다. 우리, 다시 시작하자.
우리라는 말의 뜻을 생각한다. 우리는 두 사람이고, 하나가 될 수 없고, 그럼에도 하나가 되고 싶다. 사랑한다는 말은 가볍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 서로를 껴안고, 이토록 애타게 입을 맞추면서도 그 말만큼은 나오지 않는다. 시키 씨,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더욱 강하게 나를 당겨오고, 품에 끌어안을 뿐. 어떤 말도 들을 수 없다.
春光乍洩
L Lawliet · April Wright
폭포를 보러 가고 싶어. 재회의 키스가 끝나자마자 그는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었다.
우리 저번에 봤던 영화 있지.
네. 기억납니다.
우리도 그 폭포를 보러 가는 건 어때?
…… 글쎄요.
가고 싶어.
거긴 너무 멀기도 하고, 갑작스러워서요.
엘 답지 않은 변명인데?
답지 않은 변명. 분명 맞는 말이었다. 여행을 꺼리지는 않는다. 시키 씨가 원하는 여행이라면 언제든 가리지 않았으니까. 급하게 처리할 사건이 있지 않은 이상 당장이라도 떠날 수 있다. 그러니 너무 멀다는 변명은 실수였다. 내부 사정은 조금 다르다는걸, 시키 씨는 알고 있다. 내가 그를 아는 것만큼 그도 나를 알고 있으니. 그러니 이제는 거절할 수 없다. 자존심 싸움이란 이런 거니까. 시키 씨는 어쩌면 그 폭포 아래서 이 관계를 완전히 끝맺을 것이다. 나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서 있다가 홀로 남게 되겠지. 지난 이별들처럼. 그러나 이제 시키 씨가 돌아올 일은 없을 것이다.
여행 준비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평소와는 달리 간단한 옷가지와 지갑, 여권만 챙긴 채 우린 공항으로 향했다. 와미는 함께하지 않는다. 긴 여행이 되진 않을 거니까.
엘, 긴장했어?
아뇨,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맛있는 디저트 가게가 있을지 고민이네요.
정 없으면 내가 만들어라도 줄게. 숙소에서, 설탕이랑 밀가루를 사다가…….
…… 네.
대답이 늦어.
네. 아닙니다.
비행기의 안내 방송이 오늘따라 슬프게 들린다면 그건 분명.
내 마음이 편치 않아서겠지. 엘은 오늘도 여전히 담담하다. 구름을 뚫고 나아가는 와중에도 아무런 대화를 나누지 않는 우리. 이런 사이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분명 지독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을 만큼 사랑했고 그 시간은 영영 변하지 않을 거라 믿었다. 어느 순간부터 특별히 사랑한다는 말이 없어도 안정적이었던 우리의 애정 전선은 불안과 자존심 싸움으로 변하였고 나는 그걸 어렴풋이 납득했다. 엘의 이름이 아득해진 건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내가 헤어지자고 하면 어떻게 할 거야?
글쎄요. 시키 씨가 그렇게 말한다면…….
응?
헤어져야겠죠. 아무래도.
안 붙잡아?
떠나고 싶다는데, 제가 붙잡아도 소용이…….
그날 마셨던 히비스커스는 향이 유독 강해서 씁쓸하기만 했다. 역시 커피를 마실 걸 그랬어. 엘은 각설탕을 잔뜩 넣은 커피잔을 내 앞으로 가져다 두었다. 나 그렇게까지 단 커피는 조금 그래. 오늘은……. 오늘은. 커피잔을 다시 엘의 앞으로 밀어두면, 엘은 그 잔을 들여다보았다. 자신의 눈이 빤히 비칠 때까지 바라만 본다. 그런 엘의 반응에 괜히 짜증이 나서 그만 헤어지자고 말해버렸다. 우리의 첫 번째 이별은 이랬다.
언젠가부터 엘은 나를 바라지 않는다. 그게 참 싫었어. 이별을 각오한 사람처럼 굴어서. 나를 욕심 내줬으면 했어. 영원히 나만을 갖고 싶다고. 네 방에 꼭꼭 숨겨놓고 혼자만 바라보고 싶을 정도로 날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해준다면 나는 기꺼이 네 방의 화분이 되어줄 텐데. 기쁜 마음으로. 예쁜 꽃을 틔우면서. 평생토록 네 손에 자라날 단 하나의 식물이 되어줄 수 있는데.
그럼에도 그는 헤어지자는 말에 단 한 번도 대답한 적 없었다.
시키 씨는 언젠가부터 변덕을 부리기 시작했다. 함께 먹고 싶어서 준비했다던 히비스커스 티의 맛이 변했던 시점부터. 시키 씨는 그날 처음으로 집을 떠났지만, 며칠 뒤 돌아왔다. 짐을 찾으러 왔다는 말에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이며. 시키 씨가 집에 돌아오면 나는 묵묵하게 받아들인다. 다시 시작하자고 말하면 여과 없이 함께하고, 헤어지자 말하면 고개를 숙인다. 붙잡을 수는 없다. 붙잡는 행위 자체가 시키 씨의 뜻에 반대되는 것이라면 하지 않는 편이 낫다. 그런 마음으로 매번 포기를 해왔다. 그러니 시키 씨의 변덕을 즐기면 된다. 납득할 수 있다. 체념하기 때문에.
25시간의 긴 비행 동안에도 우리는 긴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물 마실래? 네. 담요 필요하신가요. 응. 배고파. 저도요. 길고 긴 침묵. 이 어색한 공기 속에서는 어떤 기류도 흐를 수 없다.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손을 잡았다. 먼저 뻗은 건 나였다. 엘, 이쪽 길인 것 같아. 자연스레 손을 뻗으면 엘은 그 손을 잡아주었다. 평소보다 유난히 차가운 체온. 마른 손가락 마디마다 내가 모르는 감정들이 묻어있다.
엘과 함께 여행을 가고 싶었어. 즐겁게 길을 걷고, 관광지에 들러 감탄하고, 그 지역의 맛있는 디저트를 먹으면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완전히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영화에서 봤던 두 사람이 마음에 마침표를 찍었던 그곳에 서서, 우리의 마음은 남들과 다르다는 걸 알고 싶어서.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시키 씨는 처음으로 용건 외의 말을 꺼내었다. 기분이 어때? 어떤 말을 건네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모르겠다고 답했다.
기쁘지 않아?
기쁜 것 같습니다.
여행이 싫어?
싫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번 여행이 지나면, 다음은 없을 것 같아서요, 시키 씨. 그렇게 말하면 될까요. 멈춰버린 말의 내용은 숨길 수밖에 없다. 이건 정답이 아니니까. 그저 투정과 어리광에 가까운 이 말은 시키 씨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으니.
그 대화 이후로 우리는 오래도록 말이 없다. 시키 씨는 나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 지독할 정도로 앞만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 순간, 정차 벨을 누르더니.
나는 늘 그게 괴로웠어. 왜 말해주지 않는 거야?
그 말만 남긴 채, 순식간에 자리를 떠나버렸다. 낯선 길에 멈춰 선 그를 바라볼 틈도 없이 버스는 떠난다. 폭포를 향해. 여전히도 덜컹거리며. 엘은 버스에서 내리지 않는다.
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시키 씨의 생각도요.
네가 나를 더 원했으면 좋겠어.
그러면 그렇게 말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날 사랑해줘.
놓지 말아 주세요.
네가 나를 붙잡아 준다면, 나는 정말 그걸로도 좋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