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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ipped

히메유에 - 유에

Flipped

 

푸른 물망초색 머리칼에 반짝이는 금안을 가진 예쁘장한 소년. 그게 당신과 나의 첫 만남이었어요, 히메루. 당신이 기억할지는 모르지만 나는 아직도 똑똑히 기억해요. 나의 집 맞은편으로 이사 온 당신이 내게 처음 말을 건넸던 그 순간의 온기, 풀내음, 매미의 울음소리 모두. 그렇게 나는 당신에게 첫눈에 반했고, 나의 마음을 아낌없이 전했어요. 당신은 "완벽한 사람"이었으니까.

 

 

 

 

"히메루 씨. 그... 히메루 씨 여자친구 말일세."

벚꽃이 떠오르는 연분홍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히메루보다는 조금 어려 보이는 한 소년은 난감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히메루에게 이야기했다. 히메루는 "그 애"를 자신의 여자친구라고 부르는 후배, 오우카와에게 조금은 언짢은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어갔다.

 

"... 아마도 유에를 말하는 것 같군요, 오우카와. 그런데 그녀는 그냥 히메루의 친구일 뿐입니다."

"그려, 그 유에 씨 말일세. 아까 하교하는 길에 봤는디, 공원에서 난동을 피우고 있더구먼."

 

 

 

 

히메루는 오우카와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유에가 "난동"을 피우고 있다는 공원으로 달려갔다. 그는 폭발하기 일보직전이었다. 나기노 유에, 당신이 평소에도 자주 무모한 짓을 하는 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수줍음이 많아 부끄러워하면서도 자신에게 치대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당신이 "난동"이라니. 히메루를, 나를 귀찮게 하지만 단 한 번도 규칙을 벗어나는 행동 따윈 하지 않던 당신이었는데. 

 

이런저런 생각으로 가득찬 무거운 머리를 이끌고 도착한 공원에는 유에와 공원 관리자들, 그리고 지나가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히메루는 그의 머리 위에서 울리는 유에의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곧, 무섭도록 차가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신은 필시 높은 곳을 두려워하는데, 어떻게 2미터는 족히 넘는 그 거대한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건지.

 

당신은 당황스러움과 걱정으로 가득찬 나를 나를 발견하고 언제나 그렇듯이 웃으며 인사했다. 그리고 소리쳤지. 같이 이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나무 위에 올라와달라고. 아니, 울면서 도와달라고 했던 것 같아. 사람들의 시선은 곧 이쪽을 향했고, 난 네 행동 때문에 덩달아 받는 저 사람들의 시선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었어. 그리고 이건 유에, 네가 자초한 일이니까. 그 오래된 나무 따위가 뭐라고. 

 

 

 

 

"유에, 넌 히메루가 왜 좋아?"

"음... 잘생기고, 공부도 잘하고, 항상 변함없이 날 대해주니까! 완벽한 사람이라서 좋아."

 

그런 줄로만 알았어. 그래서 네가 이따금 나를 보고 인상을 찌푸리거나, 내가 직접 딴 딸기를 버리는 것도 괜찮았어. 공원에 있던 큰 나무가 베어지는 그 날, 나를 향해 매몰차게 돌아선 것도 괜찮았지. 당신은 완벽한 사람인 것에 비해, 나는 한없이 부족하니까. 그렇게 믿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만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알고 있어. 당신도 그저 그런 불완전한, 한낱 인간일 뿐이니.

 

 

 

 

"야, 메루메루! 저번에 공원에서 시위하던 네 여친 말이야, 무슨 벌점을 30점 넘게 받아서 교외봉사 한다던데, 좀 도와줘라! 너 좋다고 따라다녔던 얘잖냐, 캬하핫!"

"닥치세요, 아마기 선배. 그리고 그건 유에 본인이 자초한 겁니다. 고작 나무 하나 베는 걸로 학교를 시끄럽게 만들다니. 그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겠네요. 히메루는 어쩌다 그 얘와 엮여서 무척이나 피곤하거든요."

 

학교 내 문제아로 불리는 아마기 린네 선배와 내 이야기를 하는 것도 조금은 아프지만, 괜찮았어. 그런데... "고작 나무 하나"라니. 당신이 기억해줄 거라고 믿은 내가 바보였던 거겠지. 딸기나무 앞에서 자신을 잊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던 어린 소년은 이미 어디론가 가버렸고 남은 거라고 당신이구나, 히메루. 그러니 이제 난 당신을 좋아하지도 않을 거고, 당신과의 약속도 끝내야겠지. 

 

 

 

 

 

"자, 그럼 제7회 바스켓보이 대회는 여기서 마감합니다! 이제 여학생들은 자신의 바스켓보이를 데리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히메루는 당황한 듯 입을 꾹 다문 채, 자신에게 최고가를 건 여학생의 손에 이끄려 따라갔다. 그의 눈은 보라색 머리칼에 자수정을 박은 듯 눈이 반짝거리는 소녀, 유에를 향했다. 그는 혼란스러웠다. 유에라면, 반드시 이번 경매에서도 자신에게 돈을 걸었어야 하는데. 그 앤 나를 좋아하니까. 그런데, 어째서 저 먹보 시이나 선배와의 저녁식사권을 산 걸까. 신경 쓰이게.

 

시이나 선배는 역시나 모두의 예상대로, 이미 데이트 분위기는 안중에도 없이 허겁지겁 뷔페 음식을 먹어치웠다. 그리고 유에는 그가 체하기라도 할까, 음료수를 가져다주었다. 히메루는 도무지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시이나 선배는 당신 앞에서 허겁지겁 먹어대기만 하는데, 당신은 뭐가 그리 재밌다고 웃어대는 건지. 최근 들어, 당신이 나에게 예전만큼 치대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어, 유에.

 

 

 

 

"유에, 나와 잠깐 이야기 좀 해요."

"지금은 니키 선배랑 식사 중이니까, 나중에..."

"어차피 시이나는 지금 음식을 처먹느라 당신은 안중에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사랑한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야 메루메루. 너 그 얘, 유에한테 차였다며!"

"힘내게, 히메루 씨..."

"으... 히메루 군이 거기서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지고, 다들 나가버렸거든여! 더 먹을 수 있었는데!"

그렇습니다. 나는 그날 무모하게 고백을 해버렸고, 유에는 내 손을 뿌리치고 연회장을 나가버렸습니다. 나와의 식사권을 샀던, 기억도 안 나던 여학생에겐 뺨을 맞았고요. 그렇게 싸해진 분위기로 연회는 곧 끝나버려, 시이나는 음식을 더 먹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제 명백해졌네요. 히메루가, "내"가 나기노 유에, 당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유에, 여기에 핀 잡초 좀 뽑아줄래?"

"이건... 잡초가 아니라 물망초잖아요, 아저씨."

"이 화단에서 쓸모없는 건 그게 꽃이든, 나무든 잡초라고 한단다."

쓸모없는 것은 잡초가 되다니. 나도 당신에게 쓸모없는 잡초 같은 존재였을까, 히메루.

 

물망초, 그 애를 닮은 꽃. 물망초의 꽃말은 "나를 잊지 마세요"라는 뜻이라고, 네가 그랬었지. 그리고선 내게 꼭 기억해달라고, 잊지 말아 달라고 외쳤었지. 하지만 그 약속을 기억하고 지키기에 당신은 너무 어렸나 봐. 그러니 이젠 미련 없이 당신에 대한 내 마음도, 이 잡초처럼 정리해야겠지. 어차피 당신은 나를, 우리의 약속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으니.

 

 

 

 

유에는 텃밭의 땅을 고르게 뒤섞은 뒤, 비료를 뿌리고 물뿌리개를 가지러 창고에 갔다. 그리고 그녀가 물이 가득 담긴 물뿌리개를 간신히 들고 화단으로 돌아오자, "그 애"가 거기에 있었다. 히메루는 유에가 기껏 잡초를 뽑고, 돌을 골라낸 화단에 들어가 땅을 헤집고 있었다. 기가 막힌 것은 그런 히메루를 보고도 방관하고 있던 공원 관리자 아저씨였다. 유에는 소리쳤다.

 

"뭐하는 거야, 히메루!"

"공원 관리자 분께 허락은 받았습니다."

"이건..."

나기노 유에. 항상 보름달처럼 환하게 웃는 당신. 난 당신을 처음 본 순간 직감했어요. 당신은 내 골칫덩이가 될 거라고. 그리고 나의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그렇듯이 맞아떨어져, 내가 이사 온 그날부터 당신은 나만 계속해 따라다녔죠. 달은 항상 지구에게 한 쪽 면만 보여준다고 해요. 당신처럼. 항상, 변함없이. 그리고 그건 꽤나 신경 쓰이니까요.

 

"히메루가 기억을 못 할 리 없잖아요, 유에. 단지 당신이 더 나은 선택을 하길 바랐을 뿐이에요. 히메루는 알다시피 완벽한 사람이 아니니까."

"... 딸기나무네요."

"네. 당신에게 바치는 내 마음입니다, 유에. 사랑과 존경을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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