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eing (더 랍스터)
하인위레 - 사유
S#.10 INT. 세미나홀(낮)
사회자 : 다음 순서는 106호, 3일째.
(NAR.) 모두가 돌아가며 자신의 소개를 하는 시간이다.
하인즈 : (단상에 서 마이크를 잡으며, 빠르게 무대 중앙으로 걸어나와) 알프레드 감독을 아시는 분이 계신가요?
정적이 감도는 회장.
하인즈 : 아, 강의에 익숙하다보니... 마이크를 잡으면 질문으로 시작하네요. 미안합니다. 강의가 아니라 제 이야기를 하는 건 처음이라서요. 제가 그닥 매력적인 사람은 아니겠지만, 이 감독의 영화에 대해 아시는 분과는 이야기를 나눌 의향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검은 와인병을 마시지도 않고, 중요한 서류가 든 가방은 기차에 두고 내리는 이야기입니다. 뒷이야기를 아시는 분은 저와 그 이야기를 하러 와주세요.
순간 위스퍼레인의 표정이 처음으로 풀어진다.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리는 입을 클로즈업. S.11로 이어진다.
S#.11 INT. 복도(낮)
하인즈와 위스퍼레인, 마주보고 서 있다.
(NAR.) 맥거핀.
돌아보는 듯한 하인즈의 놀란 표정.
위스퍼레인 : 영화는 ‘싸이코’... 맞나요? (올려다보며, 눈치를 보듯)
하인즈 : (내려다보며) 이렇게 벌써요. 저는 적어도 서너 번 다른 얘길 하고 다닐 생각을 했는데.
위스퍼레인 : 당신의 그 말 자체가 맥거핀이었다고는 하지 마세요.
하인즈 : 그럴리가요. 전 영화 감독이 아니랍니다.
S#.12 INT. 복도(낮)
하인즈 : 그럼 서로를 알아가보죠.
위스퍼레인 : ...이렇게 벌써요.
하인즈 : 그러고 싶었으니 대답을 한 거 아닌가요?
(NAR.) 그래, 사실 나는 이 남자가 궁금했다.
S#.16 EXT. 호텔 밖 공원(일몰)
하인즈와 위스퍼레인, 물가를 걷는다.
위스퍼레인 : 왜 그런 말을 하셨나요? 이런 영화... 사람들이 보고 말고를 떠나서, 당신이 하고 싶던 말은 그뿐이 아니잖아요.
하인즈 : 전략적인 거죠. 어쨌든 공통점이 있고 그걸 증명할 수 있으면 되잖아요. 같은 작품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그정도의 접점으로도 사람은 흥미를 가질 수 있어요. 설령 좋아하는 게 아니더라도 말이죠. 좋아한다고 하면, 다들 더 낭만적으로 생각하겠지만. (걷는 내내 무작위의 제스쳐)
위스퍼레인 : 하지만 그렇게 수수께끼처럼 말하다니 도박과도 같아요.
하인즈 : 뭐 어때요. 저는 같이 소통할 수 있다, 같은 언어를 쓴다는 것만으로도 멋진 공통점이라고 설득할 생각이었는데요. (위스퍼레인을 돌아보며) 저는 제 눈앞에 '그런 사람'을 만났으니까 성공한 거죠.
위스퍼레인 : 그래요? 저를 그렇게 설득할 생각이셨나요?
하인즈 : 속이는 게 아니잖아요.
조용해지면 바람에 흐트러지는 호수의 표면. 걸음을 잠시 멈춘다.
위스퍼레인 : 수면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 투명한 갈매기떼가 잔뜩 날아가는 것 같아요.
하인즈 : 그런가요. 제가 보기엔 커튼 같네요. 아니면 베일...
S#.25 EXT. 사냥터로 향하는 버스(밤)
좌석들은 꽉 차있다. 하인즈와 위스퍼레인은 옆자리에 앉았다.
하인즈 : 되기 싫은 동물은 있었어요... 앵무새. 그리고 되고 싶은 동물은 정말 열심히 생각했죠. 전 참을성이 없으니까, 혹시나 아무도 저와 맞지 않는다면 죽을까 싶었죠.
위스퍼레인 : (들고 있는 총을 만지작거린다) 전... 해파리요.
하인즈 : 왜죠?
위스퍼레인 : 한없이 연약하지만, 살아갈 수 있으니까.
하인즈 : 몰랐는데 누구보다 죽고 싶지 않은 사람이군요.
위스퍼레인 : 제가 죽는 게 중요한 게 아니예요. 처음엔 제가 죽어도 잊어줄 냉혈한 사람만을 찾았어요. 하지만 그 연기가 오래 갈 수는 없어서 결국 다 깨져버렸죠.
하인즈 : 보통은 죽어도 남아 있을 상대가 있으면 안심하지 않나요?
위스퍼레인 : 그렇지 않아요. 하인즈 씨는 남겨진 적이 없군요.
하인즈 : 애초에 같이 있었다면 말이죠.
위스퍼레인 : 파트너가 없어져서 여기 온 거잖아요.
하인즈 : 저의 이런 무심함에 질렸다고 다른 남자를 만나서 그래요.
(NAR.) 무심함. 나는 사냥이 시작하기 전까지 그 단어를 오래 곱씹었다. 우리 뒷좌석에서 누군가 ‘무심한 남자들은 짜증난다’고 중얼거렸는데, 그녀는 단상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엊그제 식당에서 인사를 나누었던 에이프릴이었다...
인서트- 대화하는 노란 머리의 여자와 위스퍼레인. 남편과 헤어져서 왔다고 침울해한다(NAR.). 위스퍼레인, 애써 위로한다. 복도 구석이 그림자진다.
위스퍼레인 : 아... (돌아보려다)
버스가 멈춘다. 덜컹.
하인즈 : 이따 봐요.
S#.30 EXT. 호텔 앞(밤)
사람들이 늘어서있고, 앞에 몇몇 누운 사람들이 시체처럼. 사냥에서 쓰러진 위스퍼레인과 노란 머리의 여자를 하인즈는 내려다본다.
직원 : 106호, 하인즈. 날짜 변동 없음. (지나간다)
S#.46 INT. 하인즈의 방
하인즈 : 동물들의 사이에 있으면 제가 인간임을 알게 되는 것만 같죠. 생각해봐요. 위스퍼레인. 우리는 동물이 된 저 자들이 여전히 인간의 욕망을 가졌는지 몰라요.
위스퍼레인 : 저들의 선택을 무시하지 마세요. 당신이 인간이라고 우월하다는 것처럼 들려요.
잠시 정적. 카메라는 침대의 빈자리를 비춘다.
하인즈 : 글쎄요? 저는 인간이고 싶어요. 당연하잖아요. 인간과 동물의 가장 큰 차이가 뭔지 아세요? 동물은 욕구만을 가지고 움직여요. 하지만 인간에겐 욕구와 '욕망'이 있죠. 그 욕망은 혼자서는 충족할 수 없는 것이에요... 내가 아닌 다른 것이, 다른 사람이 투영하는 나.
위스퍼레인 : 하인즈 씨.
하인즈 : 영화를 보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당신과 나는 인간이에요. 그럴 수밖에. 좋아하는 작품들이 비슷하다는 건 저희의 욕망이 비슷하다는 뜻이죠. 당신이 절 마음에 들어하지 않더라도 그 사실은 같아요.
위스퍼레인 :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하인즈 : 무슨 마음인지 알아요. 저도 스스로 굉장히 당황스럽거든요.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은 질렸어요.
(NAR.) 나도 질렸다. 그러니 이곳도, 딱히 기대하지 않았는데. 그는 내가 가지고 싶었던 의문을 대신 가졌다. 그저 손에 든 커피잔을 젓고 또 젓는다.
하인즈의 소리가 나레이션처럼 처리되는 동안, 커피잔과 벽지 무늬가 교차된다. 위스퍼레인은 반박할 마음이 없는데도 마음이 편치 않다.
하인즈 : 동물이 되라는 정책은 터무니없어요. 동물이 되면 나를 잃을지 어떻게 알고요? 나는 나이고 싶어요. 나여야만 해요. 나는 인간이기에 나 자신이었다고요.
위스퍼레인 : 그럼 의견을 들려줘요. 동물이 되면 자신을 잃을지 어떻게 아는지.
하인즈 : 당신의 이야기를 예시로 들어도 되나요? 싫다면 하지 않을게요. 더 이상 이미지가 깎이는 건 싫으니.
위스퍼레인 : (바로 대답한다) 괜찮아요.
하인즈 : 당신이 남을 상처입히느라 두려운 것도 동물이 되면 당신의 친구들이 그 동물로 당신을 떠올릴 걸 두려워하는 거잖아요. 그렇죠? 잃고 싶지 않은 거잖아요, 우리는.
위스퍼레인 : (입술을 지긋이 깨문다)
S#.47 INT. 하인즈의 방
창문. 씬 바깥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소리들. 하인즈와 위스퍼레인은 창가로 가 바깥을 살핀다. 프레임 양 끝에 숲으로 방생되는 동물 서넛과, 싸우는 파트너가 각각 지나간다.
(NAR.) 싸우는 저들은 아는 얼굴 같았다. 하인즈는 그제서야 말을 멈추었고, 나는 나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 적막이, 순간 싫었다. 차라리 뭔가 말해주길 바랐다. 화를 내더라도.
S#.70 INT. 무도회장
밝은 조명과 음악이 흐르는 회장 내, 하인즈와 위스퍼레인은 춤을 추기 시작한다. 주변 사람들도 제각각 팔을 뻗고 빙글빙글 돌며 즐긴다. 눈이 마주친다.
하인즈 : 왜요?
위스퍼레인 : 눈은 영혼의 창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하인즈 : 나는 영혼따위 믿지 않아요. 내가 죽으면 남는 건 데이터에요. 내가 만들어둔 것이 남죠. 그게 내 이름에서 떠오르는, 날 뒷받침하는 존재로 떠돌겠죠.
위스퍼레인 : 그렇게 말하는 게 당신의 영혼을 보여주는 것만 같은데.
하인즈 : 위스퍼레인, 원래 작가였나요?
위스퍼레인 : 아뇨.
위스퍼레인이 한눈을 팔면 노란 머리의 여자와 검은 머리의 남자가 춤을 추고 있다(O.L.) 바라보다 발을 삐끗하려 한다. 하인즈가 잡아당겨 자신의 발을 밟게 한다. 엉거주춤하며 동작을 멈춘다.
위스퍼레인 : 미안해요. 에이프릴을 보느라... 발은 괜찮아요?
하인즈 : 네. 보아하니 내일도 앉아서 박수를 쳐야겠군요.
S#.71 INT. 무도회장
하인즈와 위스퍼레인의 구두만 비춘다. 하인즈의 구두에는 회색 발자국이 남아있다.
S#.87 EXT. 숲의 사냥터
사냥을 피해 도망다닌 하인즈, 숲의 외곽까지 도착해 숨을 고른다. 나무 앞에 선 하인즈는 무언가를 보고는 멈춘다. 부스럭대는 소리가 작게 들려온다.
하인즈 : 당신을 마주할 줄은 몰랐는데...
글래디아 : 이곳은 우리의 영역이니까요.
하인즈 : (길을 잃은 것처럼 두리번거렸지만, 글래디아를 마주하고는 웃는다.) 혼자?
글래디아 : (고개를 끄덕인다) 잡혀갔던 건가요? 용케 살아남았군요.
하인즈 : 아무것도 발설되지 않았으니 안심하세요.
글래디아 : 오히려 잘 대처해줬다는 건 압니다. 어떻게 처벌받지 않았는지도 묻지 않겠어요. 하지만...
하인즈 : 미안해요. 저는 사냥과는 맞지 않아서.
글래디아 : 그럼 사냥당하도록 하세요.
글래디아, 하인즈에게 총구를 겨눈다. 당장이라도 사격할 수 있는 자세.
하인즈 : 불면증이 있었는데 잘됐네요. 아, 그 총은 마취총이 아니잖아요. 절 죽여서 돌려보내줄 셈인가요? 배신한 것도 아닌데.
글래디아는 저격 자세를 유지한 채로 지긋이 째려본다. 하이앵글로 숲 위에서 둘을 내려다본다. 다시 내려오면 나무에 등을 기대고 엉거주춤 서 있는 하인즈의 모습.
하인즈 : (애써 눈을 피한다) 미안하다고 했잖아요. 돌아갈 순 없어요. 저는 하고 싶은 연구가 많이 남아 있어서...
글래디아 : ...
하인즈 : 그래요. 그래요. (눈을 마주치면서) 사실 일렉트로닉 테크노 음악이 너무 싫었어요. 다음에 뮤지컬 OST 테이프를 가져다줄게요.
글래디아 :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하.
방아쇠를 당긴다. 탕. 어디선가 새들이 날아간다.
하인즈 : 당신이 숲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혼자일 시간이 하루 늘었을 텐데. 아쉽네요. 그리고 고마워요.
유유히 빠져나가는 하인즈. 미련 없이 돌아서는 차가운 표정의 글래디아.
S#.98 INT. 식당 (낮)
케이크가 후식으로 나온다.
위스퍼레인 : 케이크는 마음과도 닮은 것 같아요. 겹겹이 쌓인... 케이크는 좋아해요?
하인즈 : (포크질을 멈추고 잠시 골몰한 표정) 그냥저냥. 하지만 제가 죽으면 다들 케이크를 먹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한 적 있어요.
위스퍼레인 : (하인즈를 슬쩍 바라보며) 그건 남은 사람들을 위해서인가요?
하인즈 : 음, 아뇨. 죽을 방식이나 그 모습을 결정할 수 있다는 건 인간의 특권 아니겠어요. 또 그게 인상적으로 남으면 왠지 사람들은 좋아할 것 같아서요.
하인즈가 포크질을 다시 시작하면 쉬폰 케이크가 화면에 꽉 찬다. 어딘가 못마땅한 듯 보이는 위스퍼레인. 둘은 각자의 접시에 다시 집중한다.
하인즈 : 뭐든 즐기는 편이 좋죠. 안 그래요?
위스퍼레인 : ...그렇겠죠.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이지만요.
계속 케이크를 먹는다. 위스퍼레인이 포크를 내려놓는다. 접시와 맑게 부딪히는 소리가 순간. 하인즈가 돌아본다.
위스퍼레인 : 저희 함께해요.
하인즈 : 이렇게 벌써요? 아, 뭔가 이 대사는 말했던 것 같아요.
위스퍼레인 : 충분히 알았어요.
하인즈 : (으쓱한다) 그건 동의해요. 그럼 커피까지 마시고 가도 될까요. 나가면 시작할 연구 서문의 첫 문장을 떠올렸거든요. (주머니의 볼펜을 꺼낸다)
볼펜의 똑딱 소리.
S#.113 INT. 세미나홀
하인즈와 위스퍼레인, 화려한 조명 빛을 받으며 단상에서 내려온다. 하인즈가 위스퍼레인을 에스코트하듯 손을 내민다.
하인즈 : 그래, 기다렸어요. 당신의 그 표정을. 표정은 빌려줄 수 없으니까.
(NAR.) 내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그는 끝까지 알려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