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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 로맨스 극장에서

허묵채은 - 채은

허묵…, 오늘 시간 괜찮으세요?

당신이 제안하는 일이라면 뭐든 제쳐둘 준비가 되어있죠. 뭔가요?

 

허묵은 두 눈을 빛내며 채은의 눈을 마주했다. 채은은 그 다정스러운 눈빛을 잠시 피하는 듯했지만, 이내 할 말을 꺼냈다. 저랑 같이 여기저기 돌아다녀 보지 않을래요? 뜬금없는 말이었다. 허묵이 이유를 묻기도 전에, 먼저 채은이 속사포로 갖은 이유를 늘어놓았다. 사심을 듬뿍 담은 데이트를 빌미로 함께하자고 하는 것을,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된다!

 

제가 요즘 쓰고 싶은 시나리오가 있는데, 남자 주인공의 역할이 필요해서요. 그, 그래서….

음?

그래서…, 제 주변에서 그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허묵밖에 없는 것 같아서… 그러는데요.

 

그, 그러니까 괜한 오해는 하지 말아요! 채은은 필요 없는 사족까지 덧붙여 가며 새침하게 제안했다. 허묵은 그런 새초롬한 모습에 가볍게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스크린 너머로 수많은 사람을 보았던 허묵이 그녀의 말 하나를 이해하지 못할 확률은 거의 0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숨기려는 모습이 발칙하면서 사랑스러웠다. 허묵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당신 곁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된 것 같아 나 역시 기쁘네요.

 

*

 

그렇게 둘은 다음날, 근처의 들판으로 걸음을 옮겼다.

처음 스크린에서 튀어나온 날 흑색에 왕자 옷을 입었던 허묵은 어느덧 피부를 살구색으로 칠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입는 수수한 옷을 입기 시작했다. 몸에 바르는 화장품부터 옷까지, 모두 채은이 구해 온 것이었다. 조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는 영화 세트장에서 사용하지 않는 것들을 어렵게 부탁해서 빌린 것에 가까웠지만.

 

아무쪼록 영화 속에서 튀어나온 허묵이었기에 그는 무얼 입든 그림이 되고 작품이 되었다. 특히 채은이 너무나도 좋아하는 모습의 그였기에, 채은의 심장을 뛰게 하기에는 더없이 충분한 모습이었다. 어때요, 잘 어울리나요? 그 말에 채은은 그저 수줍게 볼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적한 들판에는 사람이 그리 많이 지나다니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이끌릴 위험이 크게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느덧 등나무꽃이 줄기에 매달려 아름답게 흩날리는 계절이었다. 흑백 영화 속에서 일생을 살아온 허묵에게는 이 세상의 모든 풍경이 낯설었다. 이토록이나 아름다운 세상이었다면, 진작에 탈출을 시도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당신을 더 일찍 만났을 텐데. 더 일찍 사랑에 빠지고, 또…….

 

이곳에서 남녀 주인공이 사랑에 빠지는 장면을 그려보고 싶어요.

당신이 만들고 있다는 그 영화 속 이야기인가요?

네. 우리가 직접 그 영화 속에 들어온 거라고 생각해 봐요. 이걸 시나리오 헌팅이라고 해요.

그럼 내가 당신의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거네요. 색다른 기분인걸요.

 

늘 같은 영화의 진부한 시나리오를 움직여야 했을 허묵에게는 그의 말대로 색다른 경험이었을 것이다. 처음 그녀는 관객으로서 그에게 다채로운 감정을 안겨 주었고, 그다음으로는 눈부신 세상, 그리고 색채로 반짝이는 그녀를 마주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이내는 더 넓고 새로운 세상이라니. 엄채은은 그에게 있어 다채로운 색깔, 그 이상의 것이었다. 영화 속에서 살던 삶으로는 더 이상 돌아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허묵에게 그녀는 많은 것을 아무런 조건 없이 주었다.

 

허묵에게 오늘은 도움만 받았네요. 고마워요. 오늘은 제가 뭐라도 살게요! 뭐 드시고 싶으세요?

음, 나는 이 세상의 음식은 잘 알지 못해서요. 당신이 추천해줄래요?

음…, 그럼 잘 따라오세요. 놓치면 안 돼요.

 

채은은 먼저 앞장서 걸었고, 허묵은 그녀를 뒤따라 걸었다. 그 덕에 허묵은 엄채은의 발갛게 달아오른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어쩐지 그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했다. 흥미로운 모습에 허묵이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미소 아래 드리워진 그림자가 점차 짙어졌다.

 

그는 문득 조금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우리가 평범한 연인이었다면, 아니, 연인이 아닐지라도 우리가 평범하게 만났다면, 분명 지금보다 더욱 즐거운 일이 많았을 것이다. 그녀의 손을 잡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앞에서 등지고 걷는 그녀에게 다가가 너른 품 안에 넣을 수도 있었을 테다. 흑백의 세상을 뒤로한 채 스크린 밖으로 나온 대가. 순리를 거스른 값. 그 대가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했다. 사람의 온기를 느껴서는 안 된다는 것. 그 대가는 완전한 소멸로써 갚아야 했다.

 

아직 엄채은은 허묵의 비밀을 알지 못했다. 그의 손을 잡지 못한 것은 그저 부끄러운 마음이었다. 허묵은 엄채은에게 ‘가장 좋아하는 영화 속 가장 좋아하는 남자주인공’이고, 그런 존재에게 먼저 손을 내민다는 것은 적어도 채은에게는 감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언젠가는 그에게 손을 잡자고 말하는 날이 올까? 앞으로 펼쳐질 그와의 일상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허묵의 속은 알지도 못한 채, 엄채은은 그저 허묵에 대한 마음을 조금씩 키워 나갔다.

 

그도 모르던 사이 이별의 시간은 조금씩 다가왔다. 물론 허묵도 이를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엄채은은 그에게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모든 것을 안겨준 이였으므로, 그 또한 그녀와 남은 일생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만큼 저를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할 채은의 일생은 과연 행복할까. 그 생각이 조금씩 허묵을 좀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이 비밀을, 그녀에게 언제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그조차도 허묵은 자신이 없었다. 무지개의 아름다운 색을 본 남자가 더 이상 잿빛 세상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니까 지금은, 지금 이 순간 채은과의 시간에 충실하도록 하자. 허묵은 그리 생각을 갈무리하며 채은의 뒤에서 그녀와 발을 맞춰 걸었다.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파는 곳을 알고 있어요. 같이 가요. 해맑게 웃으며 통통 튀는 걸음을 옮기는 그녀에게, 허묵은 미소 섞인 대답으로 화답했다. 당신보다 달콤한 건 없을 테지만, 당신과 수많은 달콤함에 대해 알아가고 싶어요.

그래요, 적어도 지금은. 마지막 말은 애써 목구멍 아래로 삼킨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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