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풍의 언덕
오소사희 - 사희
<폭풍의 언덕> 영화에 나온 장면이 일부 서술됩니다.
등장인물의 가족관계나 처한 상황이 영화와 모두 똑같은 것은 아니며, 각색이 크게 들어갔습니다.
<폭풍의 언덕> 인물들의 대사를 일부 가져왔습니다.
그 부분은 기울임 처리가 되어있습니다.
아동학대, 폭력, 불륜, 사망 등 민감한 내용이 작성되어 있으니 부디 열람에 주의해주세요!!!
어느정도 진정한 나는 유모의 도움을 받아 오소마츠를 내 방에 데려가 침대에 앉혔다. 지금 그가 내 방에 있다는 사실을 꼭 비밀에 부쳐달라고 유모에게 신신당부했다. 친절한 유모는 그렇게 하겠다며 오소마츠에게도 푹 쉬라는 말을 전해주었다. 나는 그의 다친 살갗에 약이란 약은 전부 발라주었다. 살을 에는 따가움이 밀려들었을 텐데도 오소마츠는 아프단 말 하나 없이 꿋꿋이 약을 바르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상처에 전부 약을 바르고 내가 그를 올려다 보았을 때 한없이 다정한 검은 눈동자와 마주했다. 나는 그 모습이 서러워 결국 또 울음을 터트렸고 오소마츠는 웃으며 나를 달래주었다.
한바탕 실컷 운 나는 오소마츠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그가 끔찍이도 지쳐 보였기에 질문을 삼키고 내 방 침대를 양보해주었다. 여기에 누울 수 없다고 만류하는 오소마츠를 억지로 눕혀버렸다. 마지못해 푹신한 침대에 등을 뉘인 오소마츠가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흰 이불을 끌어당겨 오소마츠에게 덮어주었다. 소리지르고 우느라 쉰 목을 가다듬으며 겨우 말을 꺼냈다.
"나는 몰래 유모 방에서 자고 올게. 허락도 해주셨어."
"아냐. 가지 말고 여기에 있어."
내 말을 듣자마자 즉시 답한 오소마츠는 불안한 강아지 마냥 표정이 굳었다. 그는 손으로 침대 시트를 슬슬 쓸다가 내 손을 잡았다. 나는 답해주듯이 그의 손을 마주 잡고 말했다.
"바닥에서 잘 순 없잖아."
"침대도 크니까 같이 누우면 되지. 내가 새벽같이 일어나서 돌아갈게."
사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나는 거절할 수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아픈 사람이 혼자 남기까지 한다면 꽤 서러울 것 같았다. 나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에 걸터 앉았다. 오소마츠는 눈에 띄게 안심해서 내 허리를 두 팔로 끌어당겨 안았다.
"이러면 내가 앉아서 자야 하잖아."
나의 말에도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 등허리에 그의 규칙적이고 따뜻한 숨결이 닿아 흩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는 내 뒤에 바짝 붙어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다정한 손길로 그의 손을 떼어내고 침대에 제대로 눕혀주었다. 창 밖으로 달이 기우는 걸 보며 나도 그의 옆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녹슨 경첩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손톱으로 요령껏 긁어내면 겨우 문 노릇이나 하고 있는 이 판자에서 몇 년간 방치 된 흙먼지들이 쏟아졌다. 예상대로 오소마츠가 들어왔다. 나는 그를 놀래켜 줄 요량으로 서둘러 몸을 낮추어 침대 밑에 들어가 숨었다. 목구멍이 절로 따가워졌지만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그가 들어오기 전에 숨었다고 생각했다. 들키지 않을 것이라는 내 생각은 오산이었다. 웃음을 참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을 몇 번 더듬는가 싶었던 따뜻한 두 손이 곧 나를 찾아 끌어당겼다. 틈 사이로 날 보고 있는 오소마츠는 분명 먼지 이는 바닥에 나와 같이 엎드려 있을 터였다. 잡은 손을 어루만지며 서서히 잡아당겼다. 나는 한숨을 쉬며 침대 밑에서 기어 나왔다. 오래된 먼지에 뒤덮여 엉망이 되어버린 나를 보던 오소마츠가 다정한 손길로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나는 손길이 움직이는 방향대로 고개를 기울였다. 작게 나 있는 깨진 창 안으로 따뜻한 저녁의 햇살이 스며들었다. 곧은 빛줄기가 방 안을 비추자 부유하는 먼지가 보였다. 크기가 제각각인 먼지들은 주로 오소마츠와 내가 앉아 있는 방향에서 춤을 추듯 유영했다. 깨진 곳에서는 찬 바람이 들어왔다. 볼품없는 커튼이 나부꼈다. 손가락 틈새로 엉킨 머리카락이 걸린 건지 내 입에서 신음이 흘렀다. 분명 얼결에 두 가닥 정도는 뽑혔으리라. 오소마츠는 금방 당황해 손을 뒤로 숨겼다. 나는 괜히 장난기가 돌아 그에게 머리카락을 내놓으라며 대뜸 다가갔다. 나와 오소마츠는 또래의 어린 아이들처럼 금방 뒤엉켜 마룻바닥에 넘어졌다. 그의 등이 바닥에 부딪히자 끼익거리는 소리가 요사스럽게 났다. 햇빛 때문인지 발개진 얼굴이 더 잘 보였다. 빛무리가 오소마츠의 상흔 또한 훑고 지나갔다. 나는 머뭇거렸다.
"가만히 있어줄 수 있어?"
"장미의 부탁이라면 돌이 되는 것도 어렵지 않지."
태연스럽게 대꾸하던 오소마츠는 네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주 작고 섬세한 관절 인형을 다루듯 조심해서 오소마츠를 일으켜 침대에 걸터 앉혔다. 그 과정에서 내가 끙끙대는 바람에 오소마츠가 직접 움직였다. 가만히 있으라는 내 말은 오른쪽 귀로 듣고 왼쪽 귀로 흘려버린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침대에 앉은 뒤에도 자꾸 나보고 제 무릎 위에 앉으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서랍에서 상비용 을약 꺼냈다. 내 양쪽 발이 쪽방을 돌아다닐수록 먼지가 일었다. 나는 다시 그에게 다가가 옆에 앉고 내 반려견 러비에게 하듯이 오소마츠에게 손을 내밀었다. 흑색의 검은 눈을 하고 나를 들여다보던 그는 흔쾌히 내 손 위에 손을 겹쳤다. 나는 손등에 약을 발라주며 잔소리했다. 오소마츠는 나의 잔소리 내용을 다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약과 상처가 만나 따끔거릴 텐데도 올라간 입꼬리가 웃질 못해 꿈틀거리는 게 아니겠는가. 나는 그런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한소리 더 얹었다.
"웃지 마! 그러게 누가 옆집 애에게 그렇게 무례를 범하래? 친구가 되진 못하더라도 망신 살 일은 만들지 말았어야지. 그 애와 잘 지내고 말고는 물론 네가 정하는 거지만, 그렇다고 해서 뭐... 싸움질? ...할거면 아버지한테 들키지나 말지. 어쨌든 실망했어. 나는 오소마츠가 그렇게 앞뒤 가리지 않고......"
"...그렇지만."
"내 말 끊지 말고 들어. 나 너무 속상해. 그러게 왜 너보다 덩치도 큰 애한테 함부로 덤벼들어가지고... 싸우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리면 근처 지푸라기나 쌓아서 그거나 흠씬 때려주면 되잖아. 대체 뭐가 널 화나게 만들었던 건지 말해줘. 왜 싸웠던 거야?"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정적이 흘렀다. 나는 그가 이렇게나 망설이는 이유를 알지 못해 답답할 뿐이었다. 미간을 좁힌 나는 다시 말했다.
"...말하기 곤란한 거야?"
"으음..."
얼마 가지 않아 오소마츠의 상처 입은 손이 나를 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당황해 순간적으로 손을 내칠 뻔 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얻어맞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여기저기 멍으로 얼룩진 손은 동정심을 자극했다. 방금 막 약을 바른 탓에 쓴 냄새가 올라왔다.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왜인지 눈물이 고이는 것 같아 눈을 찡그렸다. 어깨에 볼을 부벼오는 감각이 느껴졌다. 이내 목에 댄 입술은 몸의 곡선대로 내려가 쇄골에 다다라 입맞췄다. 애교부리는 그의 행동에 좁혀진 미간이 금방 펴졌다. 그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 늘 그랬다. 고요 속에서 서로만을 마주보고 있을 때면 항상 그랬다. 오소마츠는 손을 뻗어 내 손을 감싸 잡았다. 망설이다가 입술을 떼었다.
"...장미를 사랑한다고 했어."
"...뭐?"
"이래서 말하기 어려웠던 거야. 미안."
당황스러움에 나는 어떠한 말도 더 꺼내지 못했다. 아버지의 서재에 꽂힌 모든 책을 읽어도 걔가 나를 왜 좋아하는지는 알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오소마츠와 나를 놀리려고 한 말이었나 싶었다. 내가 혼란스러워 하자 오소마츠는 나를 달래주었다. 상처가 가득하지만 여전히 따뜻한 그 품에 나를 안았다. 오소마츠가 이렇게 나를 위로해 줄 때면 한참을 안겨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소마츠는 내가 자신의 것이라도 되는 것마냥 나를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온기가 흐르는 품에 기대었다. 나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오소마츠는 내내 뜨고 있던 것 같았다. 내가 눈을 뜰 때마다 그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어느새 어두워진 바깥 풍경만큼이나 달밤이 켜켜이 박힌 검은 눈으로 집요하리만치 쳐다봤다. 부담스러워서 처음에는 그가 눈꺼풀을 감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무서웠지만 나와 눈이 맞닿을 때마다 너는 익숙한 모양으로 웃었다. 너무 오래 안겨 있었는지 몸이 뻐근했다. 내가 품에서 빠져 나오려고 하자 오소마츠는 아쉬운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나는 오소마츠의 다리가 저리지는 않을지 생각했다. 쪽방에서 나오려고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을 맨발로 밟았다. 문에 달린 손잡이를 당길 즈음에야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장미야."
"응?"
"언젠가는 내가 워더링 하이츠의 어떤 창문에서 밖을 내다보아도 장미꽃을 볼 수 있게 해줄게. 히스꽃은 질렸다고 했잖아."
나는 몸을 돌려 쏜쌀같이 달려가 그를 껴안고 얼굴에 키스를 세 번 정도는 해주었다. 오소마츠가 활짝 웃었다. 히스꽃의 꽃말은 '고독'이다. 빼곡하게 꽃이 핀 줄기를 내놓고 바람에 흔들리는 그 꽃들을 보고 있자면 나조차도 넘실거리게 된다. 나는 히스꽃을 볼 때면 상상과 현실의 간극에 갇혀 마지막까지 고독해졌다. 보랏빛과 분홍빛이 섞인 오묘한 색의 촘촘한 꽃잎은 아지랑이처럼 춤을 췄다. 히스꽃이 피는 언덕에 자리잡은 집, 워더링 하이츠. 이곳에 머무는 이상 나도 쓸쓸해지는 건 아닐까 생각해왔다. 그렇게 혼자서 언덕 아래로 가라앉는 나를 끌어올려주는 사람은 오소마츠였다. 붉은 열망에 타오르는 검은 눈동자를 빛내며 꿈의 언저리에 갇힌 나를 늘 건져주었다. 나는 정말 그가 없었더라면 진작에 무슨 일이 나도 났을 것이다.
나를 더 오래 붙잡아두려고 간교한 입을 놀리는 그를 겨우 떨쳐내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나서 방 밖으로 나갔다.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언덕 너머 성당에서 들렸다. 아버지께서 계시지 않는 틈을 타 몰래 오소마츠가 지내는 쪽방으로 올라갔기 때문에 이번에도 조심해서 방으로 돌아갔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문을 열자마자 앞에 서 있는 유모를 보고 기겁했다. 마치 조각상처럼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모습이 공포스러웠다. 나는 급하게 방에 들어와 문을 조용히 닫았다. 나의 흰 잠옷에 흙과 먼지가 묻어 있는 것을 본 유모는 나를 거울 앞으로 끌어 당겼다.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은 오소마츠를 만나기 전에 비하면 꽤 더러웠다. 그를 만나고 왔음을 들킨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심한 질책은 하지 않았다. 그저 옷을 털어줄 뿐이었다. 나는 그 모습에 안심해 숨을 삼켰다.
"아가씨께서 멋대로 도련님을 만나고 다니는 걸 주인 어른께서 아시면 어떡해요?"
"그렇지만 나는 유모가 오소마츠를 도련님이라고 불러줘서 좋아."
"지금 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닐텐데요."
"오소마츠를 존중하는 유모가 멋대로 일러바칠 사람이 아니란 점도 좋아. 그치, 이르지 않을거지?"
내가 혼자서 조잘거리자 유모는 마치 이 어린 아가씨는 못 말린다니까, 하는 표정을 짓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환하게 웃었다. 나는 있는 힘껏 두 팔을 벌리고 유모를 바라보았다. 나의 옷을 정돈해 주던 유모는 금방 허리를 숙여 내 품에 안겼다. 아니, 내가 유모의 품에 안겼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나보다 몸집이 훨씬 큰 어른의 몸을 안는 건 버거웠다. 아무리 힘을 주며 손을 꿈틀거려도 유모의 등 뒤로 간 내 두 손은 맞닿지 못했다. 어머니를 안았을 때는 가능한 것이 불가능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유모는 조금 통통한 체격일 것이었다. 그에 반해서 유모는 내 허리를 쉽게 안았다. 나는 포근한 유모의 품에 얼굴을 기대고 꺄르르 웃었다. 유모는 내 귓가에 입을 대고 이젠 주무실 시간이라고 속닥였다. 나를 안은 팔에 가볍게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유모는 나를 안아 올렸다. 유모의 팔에 받쳐진 채 공중에 뜬 나는 아마도 침대로 가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내 생각이 맞았는지 등에서부터 부드러운 침대 시트의 재질이 느껴졌다. 큰 손이 이불을 잡아 당겨 나의 가슴께까지 덮어 주었다. 얼굴에 미소를 띄운 유모는 내 이마에 입맞췄다. 나도 허리를 일으켜 유모의 뺨에 입맞췄다. 나는 눈을 감았다.
시간이 꽤 흘러 내가 열일곱이 되는 해였다. 나는 어젯밤 들떠서 이제 잠에 들 것 같다 싶으면 설레는 마음 때문에 다시 눈을 번뜩 뜨기 일쑤였다. 내가 자는 동안 기머튼의 악단이 내 방에 다녀와 어느 때보다 경쾌한 연주를 진행하는 것만 같았다. 나의 마음은 악단의 가운데에 서서 마음껏 발을 놀리며 춤을 추었다. 배운 건 없지만 정중한 손을 내미는 오소마츠와 함께! 그래서 한숨도 자지 못했더니 지금 내 눈은 충혈되어 보기 나쁠 정도였다. 하지만 내 몸과 마음은 온통 설레는 마음으로 가득 차서 그깟 일은 대수도 아니었다. 오늘은 한 해 중에서 세 번째로 행복한 날이니까 거울 속 나를 마주하고서도 어깨를 으쓱이고 말 뿐이었다. 왜 세 번째느냐 하면 두 번째는 어머니의 생일이며, 첫 번째는 오소마츠의 생일이다. 오소마츠의 생일에 관해서는 할 말이 많다. 생일을 챙겨주려 하니 가엾게도 자신의 생일이 언제인지 모르는 오소마츠를 위해 그의 생일을 정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너의 머리카락과 눈이 그 무엇보다 검고 깊으니 밤이 제일 긴 날을 네 생일이라 하자. 내 말에 오소마츠가 손을 흔들며 반박했다. 하지만 장미를 만나고 나서 내 밤은 밝게 개었어. 나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몰라 궁리하고 있었다. 결국에는 나와 오소마츠의 생일 날짜를 똑같이 정했다. 생일은 태어난 날이잖아? 장미를 만나고 내가 다시 태어났으니 나의 두 번째 생일은 장미를 만난 날이자 너의 생일인 11월 20일로 정해야 맞겠지. 나는 오소마츠가 이토록 얼굴이 간지럽게 굴 때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어쨌든 그래서 오늘은 내가 첫 번째로 행복해 하는 날이기도 했다. 나는 흥얼거리면서 주방으로 향했다. 어느때보다 발랄한 발걸음으로 내려가니 선물상자를 든 어머니께서 보였다. 나는 잠옷 차림으로 달려가 어머니께 안겼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좋아하는 웃음 소리를 내시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나는 그 따스한 품에 안겨 있는 것을 좋아했다. 코의 말초 신경을 기분 좋게 자극하는 맛있는 아침 식사 냄새가 느껴지자 나는 어머니의 뺨에 키스를 하고 테이블로 바쁘게 뛰어갔다. 오늘따라 단정하게 옷을 차려 입은 오소마츠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활기찬 목소리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아직 잠옷 차림이라는 것도 잊고 오소마츠에게 뛰어가 얼굴에 키스했다. 그를 껴안고 시시덕거리는 나를 붙잡은 유모가 나와 오소마츠를 떼어놓으려고 애를 썼다. 유모에게는 미안했지만 힘을 주는 표정이 우스꽝스러웠다. 식탁 근처에 서 계시는 어머니가 흐뭇하게 웃는 얼굴이 보였다. 오소마츠가 날 보며 활짝 웃고 말했다.
"생일 축하해!"
"오소마츠도 생일 축하해!"
나도 곧장 화답하고 나서 오소마츠를 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실었다. 그러자 유모가 유난을 떨며 말했다.
"에구머니나, 주인 어른께서 보시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주인 마님께서 주인 어른께 잘 이야기 해주셨어요. 그래서 오늘은 다같이 식사할 거예요. 물론 이런 소동을 일으키시면 쪽방으로 돌아가셔야 하는 거 아시죠? 도련님?"
유모의 말에 금방 시무룩해진 오소마츠는 구시렁거리며 입을 비죽 내밀었다.
"내 처지는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렇지만 이게 유모 탓은 아니라는 걸 나와 오소마츠 둘 다 알고 있었기에 큰 반항은 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쓰다듬으며 일렀다.
"오소마츠, 그렇다고 유모한테 투덜거리면 안 돼."
먼저 내가 두 손으로 움켜 쥔 그의 허리를 놓았다. 오소마츠는 머뭇거리면서 내게서 손을 떼었다. 찰나에 중얼거리는 말을 언뜻 들어보니 자신의 처지에 관해 넋두리를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가 안쓰러웠지만 일단 유모가 안내해주는 내 자리로 가서 앉았다.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딸기파이를 보자마자 절로 군침이 돌았다. 적당히 잘 구워져 갈색빛을 띄는 테두리와 그 안에 담긴 딸기시럽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나는 이 파이를 칼로 어떻게 잘라야지 모양을 망가트리지 않을까에 대해 고심했다. 그 사이에 아버지께서 오소마츠와 나의 생일상이 차려진 테이블로 걸어오셨다. 근엄하고 무서운 표정은 여전했으나 내 이마에 입맞추며 축하의 말을 전할 때는 얼굴이 누그러졌다. 그래도 나는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도무지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가 없었다. 예전에는 좋아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오소마츠를 학대하는 장면을 마주한 날에야 나는 아버지를 더이상 좋아할 수 없을 것이라 뼈저리게 느꼈다. 인생에서 지워내고 싶을 정도로 끔찍한 기억은 날씨가 화창함에도 불구하고 산책을 일찍 끝내고 돌아온 날에 각인됐다. 모든 게 괜찮았던 날이었다.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적에는 오소마츠의 몸이 성하지 않은 날이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보다 체격도 크면서 툭하면 아픈 체질인 줄로만 알았다. 오소마츠의 멍자국을 처음 마주하고 난 뒤로 키가 어느정도 컸을 때였다. 함께 쪽방에 올라가 있던 나는 그의 종아리에서부터 발목까지 길다랗게 난 붉은 상처에 대해 물었던 적이 있다. 나는 조심해서 질문하였다 생각했는데 오소마츠는 굉장히 당혹스러워하며 이불을 잡아 당겨 다리를 가렸다. 나는 그런 오소마츠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몇 밤 지나지 않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가 오소마츠를 굉장히 아끼는 것을 알고 있었던 아버지께서 나와 당신의 사이에 분란이 일어나는 게 싫으셨던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볼 수 없을 때에 틈틈이 오소마츠를 장난감 취급했다. 사업이 하락세를 보이거나 그저 자신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오소마츠는 종종 서재로 불려 갔을 것이었다. 오소마츠가 온 뒤로부터 잘 되던 일도 풀리지 않는다는 게 아버지의 핑계였다. 아버지께서는 오소마츠를 싫어했기 때문에 나와 그가 가까이 지내는 것을 언짢아하셨다. 마지막으로는 늘 이 사실을 나에게 말하지 말 것을 강조했다고 그에게 전해 들었다. 만약 자신의 딸이 알게 되는 날에는 우리 둘을 영원히 떨어트려 놓을 것이라는 잔인한 으름장을 놓았다는 말을 했다는 것까지 전부 들었다. 나는 워더링 하이츠 집안의 유일한 외동딸이었기 때문에 아버지께서는 나를 끔찍이도 귀여워하셨다. 그렇기에 자신이 오소마츠를 학대하는 것을 나에게 들키게 된다면 부녀 사이가 굉장히 서먹해질 것이라 생각했을 법했다. 하지만 나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오소마츠에게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나에게 진실을 들킨 아버지는 그 뒤로 오히려 뻔뻔하게 행동했다. 나에게 대하던 태도까지 예전같지 않았다. 네가 보았던 것은 오해라고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렸다가도, 내 앞에서 대놓고 오소마츠를 손찌검했다. 나는 믿을 수가 없어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줄만 알았다. 나와 오소마츠의 생일상에 놓인 파이를 써는 아버지를 보니 내가 첫 번째로 좋아하는 날임에도 속이 울렁거렸다. 아버지가 파이를 썰자 안에 담긴 내용물들이 접시 위로 우르르 쏟아졌다. 아버지는 짐짓 웃으시며 내 몫으로 파이 한 조각을 주셨다. 어머니의 음식 솜씨는 뛰어났지만 나는 깨작거리며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그 와중에 아버지는 옆집 드러시 크로스에 사는 남자애 이야기를 떠벌댔다. 생일이지만 기쁘다기보다는 어딘가 찝찝했다. 나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더이상 식사를 할 수 없을 것 같아 포크를 내려놓았다. 내가 식사를 마치니 아까부터 뚫어져라 나를 쳐다보고 있던 오소마츠도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미리 작당 모의를 한 것도 아니었지만 누가 뭐라 할 새도 없이 밖으로 향했다. 유모는 그대로 나가시면 춥다고 기겁하며 내 뒤를 따라와 어깨에 두껍고 긴 숄을 덮어줬다. 말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냐며 버르장머리가 없다고 혼쭐을 내주겠다 일어서는 아버지를 겨우 말리는 어머니가 보였다.
나에게로 내밀어진 오소마츠의 손을 잡았다. 서로의 온기가 넘어오는 손을 쥐고 생일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며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자신이 워더링 하이츠로 오기 전에는 생일을 축하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당연히 달콤한 케이크나 파이 따위도 이곳에서 처음 맛보았다고 알려주었다. 내가 보기에는 그는 축하받을 마음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올해의 생일을 보내고 있는 오소마츠는 충분히 행복해보였다. 꼭 올해가 아니더라도 워더링 하이츠로 오고 나서 생일만큼은 꼭 즐거워했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어떻게 하면 오소마츠가 지금보다 더 기뻐할 수 있을지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궁리하며 말했다.
"아, 오소마츠. 혹시 가지고 싶은 건 없어?"
"가지고 싶다고 하면 줄 거야?"
의미심장한 답변에 나는 눈동자를 데록 굴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호탕하게 웃은 오소마츠가 뒤이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장미?"
"...그건 안 돼!"
내가 부끄러움에 기겁하며 소리쳤다. 그렇지만 오소마츠는 내가 느끼는 부끄러움의 절반도 느끼지 않는지 태연해보였다. 그는 평소와 같은 어조로 속닥였다.
"고민 해보면 안 돼?"
극도의 부끄러움 때문에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동시에 자연스럽게 이어지던 대화가 끊겼다. 나의 생각이 오소마츠의 생일 선물이라는 샛길로 빠지자 그는 이따금씩 내 손을 노골적으로 문지르며 쓰다듬었다. 나는 그의 끈질긴 손길을 신경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내가 더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오소마츠는 내 옆에서 혼잣말을 하며 중얼거렸다. 그는 콧노래를 부르는 것 같기도 했다가 쾌활해졌다가 한순간에 침울해지기도 했지만 다시 명랑하게 웅얼거렸다. 나는 발바닥에서부터 느껴지는 진득한 진흙 바닥을 밟지 않기 위해 불규칙적으로 발을 옮겼다. 그 과정에서 나는 오소마츠의 손을 놓고 혼자 앞으로 걸어갔다. 차가운 바람이 신선하니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상쾌한 기분은 여기까지라는 듯이 질척하고 미끄러운 진흙에 실수로 발을 대자마자 균형을 잡을 틈도 없이 보기 좋게 뒤로 넘어졌다. 기분 나쁠 만큼 푹신한 진흙 더미에 내 등이 부딪치자 오소마츠는 놀란 기색을 숨기지 않고 허둥거리며 발에 진흙이 들러붙든 말든 내게 뛰어왔다. 나는 괜히 장난기가 돌아 오른손으로 진흙을 아무렇게나 움켜쥐고 오소마츠에게 집어던졌다. 동그랗게 잘 뭉쳐진 진흙이 오소마츠의 가슴팍에 부딪쳐 짓이겨졌다. 기습 공격을 당한 그의 표정은 몇 초간 넋이 나가 보이기도 했지만 오소마츠는 내가 괜찮다는 걸 확인한 것으로 됐다는 듯이 금방 짓궂게 웃었다. 그의 웃음에서 내가 반격 당할 미래가 여실히 느껴졌다. 쓰러진 내가 급하게 허리를 일으키려고 하니 오소마츠가 진흙 위에 두 무릎을 대고 내 위에 엎드렸다. 나는 두 손에 진흙을 쥐고 그에게 던지려고 발버둥쳤지만 금방 억압 당했다. 여전히 몸부림을 쳐 대니 오소마츠는 낮은 웃음을 터트리며 내 뺨에 마음껏 진흙을 묻혀 대었다. 비릿한 흙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오소마츠는 나보다 큰 손바닥으로 내 아래팔의 중간 즈음을 쥐었다가 천천히 내려 손목을 스쳐지나가 내가 쥔 진흙을 짓뭉개며 손깍지를 꼈다. 그의 손이 지나간 곳에 진득하게 진흙이 묻어 남았다. 나와 오소마츠의 손바닥 틈새로 짓이겨진 진흙이 비집고 나왔다. 그는 나의 손등을 무른 지면에 대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눌렀다. 나는 적당히 힘이 실린 그의 체중에 눌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까와는 달리 사뭇 진중해지는 그의 태도에 나는 몸부림을 멈추고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나와 점차 얼굴을 가까이하던 오소마츠가 시선을 맞추고 비죽 웃었다.
"키스 하고 싶어."
"...뺨에다 해."
제법 새침하다고 생각했는지 그가 기분좋게 미소지었다.
"그렇지만 진흙 투성이인데?"
"진흙에다 하던지..."
나의 대답에 그는 유쾌하게 웃었다. 고개를 저어대던 오소마츠가 평소와 같은 장난기 어린 얼굴을 지었으나 늘 그렇듯 불안이 맺힌 눈동자를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 짧은 사이에 무슨 생각이 그의 마음을 어둠으로 덮은 건지 뒤이어 말하는 오소마츠의 목소리는 폭풍이 몰아치는 절벽에 선 사람이 낼 법한 위태로움을 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게서 도망치지 않을 거야?"
"그럴게."
갑자기 뭐 그런 걸 묻냐며 내가 즉답하자 오소마츠는 아주 조금 안심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내가 느낀 그의 감정이니 확실하지 않았다. 오소마츠는 어리광부리듯 투덜거리며 다시 말했다.
"하지만... 너는 꼭 언젠가 사라져 버릴 것 같아."
그러지 않겠다며 내가 바라보자 그는 슬프게 미소지을 뿐이었다. 오직 나만을 바라보는 두 눈에서 애상이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물기를 띤 검은 눈은 흐리게 번득였다. 내 손을 쥔 속박이 풀어지고 그는 진흙 묻은 손으로 내 뺨을 쓰다듬었다. 내 콧잔등과 이마 또한 훑어가며 만졌다. 나는 마치 작품을 다루는 움직임처럼 섬세하게 만지는 그를 올려다보며 나지막이 웃음 소리를 내었다. 그의 얼굴이 더딘 속도로 나에게 다가왔다. 키스해도 괜찮냐고 그가 다시 입모양으로 물어오자 나는 고개를 들어 먼저 그에게 입맞췄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고 뒤척이던 나는 불쑥 몸을 일으켰다가 머리가 띵한 기분을 느꼈다. 침대에 걸터 앉아서 어지러운 기분을 가다듬은 나는 마련된 실내화를 신지 않고 맨발로 뛰쳐 나갔다. 계단을 밟아 거실로 내려갔다. 잠옷이 바람이 날림에 따라 맨살을 훑었다. 입맛을 돋우는 아침 식사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이건 내가 좋아하는 크림 스프가 틀림 없었다. 나는 신이 나서 흥얼거리며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크림 스프가 든 냄비를 국자로 휘젓는 어머니가 보였다. 내가 들떠 부산스럽게 굴며 고개를 돌렸을 때, 세로로 긴 테이블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그 남자애는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무려 좋은 아침, 아가씨. 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는 아무렇지 않게 웃고는 푸른 눈을 반짝이며 나를 보았다. 나는 온통 얼굴이 빨개졌다.
인사를 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크림 스프고 뭐고 계단을 통해 2층으로 도망치듯 올라갔다. 내가 이렇게 당황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 애가 드러시 크로스에 사는 옆집 남자애였기 때문이다. 오소마츠에게 비상 상황을 보고하려고 쪽방으로 기어가듯 갔다. 문을 벌컥 열자 침대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창문 밖을 내다보고 있던 오소마츠가 보였다. 짧게 자란 검은 머리카락이 아침 햇살을 받으니 금발보다 더 반짝였다. 노크도 없이 문을 연 것치고는 오소마츠는 그다지 놀라보이지 않았다. 오소마츠는 느긋하게 나를 돌아보며 웃었다. 빛을 받고 그의 뒤가 후광처럼 번쩍이는 모습에 내가 잠시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잊어버릴 뻔했다. 바보가 될 뻔한 걸 무마하고 급하게 쪽방으로 들어오는 나를 지켜보더니 오소마츠는 몸을 일으켜 문을 대신 닫아주었다. 그는 내가 숨을 가다듬을 동안 내 등을 토닥여주었다.
"이쪽으로 오는 소리가 얼마나 요란하던지. 내가 자고 있었어도 장미가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거야."
"농담하지 마.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단 말이야."
내가 제법 심각한 낯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오소마츠는 나를 데리고 가 침대에 앉혀 주었다. 나는 내 방의 침대만큼이나 익숙한 쪽방의 침대에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그러는 동안 오소마츠는 능청맞게 내 옆에 앉았다. 도망치듯 뛰어들어온 것 치고는 나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차마 정리를 하지 못했다. 방금 본 상황이 전부 머릿속에 엉켜 풀리지 않았다. 오소마츠는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엉망이 된 손으로 근심 가득한 내 뺨을 쓰다듬었다. 손에 잡히는 것이 어찌나 소중한지 손끝은 도중에 볼품없이 떨리기까지 했다. 아무말도 하지 않는 내 입술을 오소마츠가 손바닥으로 덮었다. 내가 입술을 삐죽 내밀자 그가 웃었다. 내가 좋아하는 목소리로 달래주며 내 얼굴을 차근차근 만지는 손길에 금방 안심했다. 얼굴의 모든 곳을 쓰다듬고 마지막으로 목덜미에 손이 머무르자 나는 이제 괜찮다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어찌할 바 모르는 마음 속 깊은 감정에 뒤덮인 두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한 번 헛기침을 하고 나서 말했다.
"그 애가 왔어. 오늘 아침 식사에 초대 받았나봐."
내 말에 오소마츠는 예상했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요란스러울 정도로 고급스러운 마차가 아침부터 오더니, 워더링 하이츠 앞에서 멈춰서는 걸 봤어."
"그리고?"
"옆집 애가 내리는 것도 봤지."
나는 정말로 고통스러워하며 몸을 숙였다. 요즘 무언가 분위기가 심상치는 않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일이 이렇게 돌아갔을지는 예상도 하지 못했다. 나는 반쯤 분통에 차서 말했다.
"세상에, 오소마츠. 내가 그 몸집만 큰 남자애와 같이 아침 식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봐. 그리고... 평범한 식사 자리도 아닐거야."
저건 간단한 식사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옆집 애는 오래 전부터 나를 좋아했다. 오소마츠에게 처음 전해들었을 때에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믿고 싶지 않은 확신이 들었다. 옆집 남자애는 나를 마주칠 때면 수줍게 웃으며 말을 건네는 데다가 나를 자신의 부모에게 소개까지 시켰다. 어릴적 오소마츠와 함께 기머튼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드러시 크로스의 큰 개에게 내가 발목을 물린 날에는 그 집에서 신세를 지기도 했다. 오소마츠와 같이 있을 수 있다면 좋았을 테지만, 드러시 크로스 사람들은 아가씨인 나만 집에 들이고 오소마츠는 내쫓았다. 나는 그 집에서 신세를 지는 동안 나와 또래 였던 옆집 남자 아이의 이름이 잭이라는 것도 알았다. 나는 잭과 수일을 같은 집에서 보냈고, 그동안에 잭이 나에게 추근대는 행동으로 보아 내가 아무리 눈치가 없다고 해도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할 수는 없었을 테다. 그리고 나와 잭이 어쩌면 결혼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제일 중요한 점은 드러시 크로스는 우리보다 잘 산다는 것이었다.
워더링 하이츠는 점점 기울어갔다. 아버지께서 벌여놓은 사업이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재를 지나칠 때마다 문 틈으로 자금이 더 필요하다는 중얼거림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어머니께서는 태어나셨을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고 전해들었다. 집안이 예전같지 않아지면서 어머니께선 요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셨다. 어머니께서 쓰러진 날 의사가 찾아왔을 때, 과한 스트레스로 건강이 많이 나빠졌다는 진단을 들었다. 그렇게 어머니의 건강은 나아지기는 커녕 오히려 점차 악화되었다.
나는 어머니를 무척 좋아했다. 나의 생일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선물해주는 것은 기본이셨다. 나는 어머니께 받은 선물을 무엇 하나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보관했다. 매년 다른 종류의 케이크나 파이를 썰어 내며 내 접시에 가장 큰 몫을 올리고 웃으시던 어머니의 얼굴은 당장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선했다. 그리고 그런 어머니께서 내 생일에 선물을 주지 않으셨던 적이 한 번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선물이었을지도 몰랐다.
눈이 내리는 이른 새벽에 어머니가 워더링 하이츠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문 앞에 뛰쳐나간 적이 있었다. 눈밭에 찍히는 어머니의 발자국 뒤로 조그마한 발자국이 이어서 늘어졌다. 선물 상자가 없다는 것에 실망하는 내 앞에 나보다 키가 더 큰 남자아이가 나타났다. 어두운 곳에서도 번뜩이는 검은 눈을 하고 있었다. 그 아이는 쏟아지던 눈을 한가득 맞고 몸이 온통 붉어져 있었다. 나는 고개를 올려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께선 웃으시며 내게 미안하다고 말하셨다. 나는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져 있는 그 아이가 안쓰러워서 내가 두르고 있던 숄을 어깨에 덮어주었다. 그 아이가 바로 오소마츠인 것이다. 나는 오소마츠를 만나게 해준 어머니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껏 그렇게 생각해왔지만, 어머니조차도 정말 나를 드러시 크로스의 남자 아이와 맺어버릴 생각이신걸까? 나는 그것을 어머니께서 바라도 따를 수 있을지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오소마츠 또한 옆집 아이가 아침부터 워더링 하이츠에 찾아온 이유를 짐작한 것 같았다. 그는 괴로운 기색을 숨기려 하면서 웃었다. 나의 등을 토닥이고 쓰다듬어내리던 오소마츠가 엉망으로 미소 지었다. 집안을 위해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할지도 모르는 나보다 훨씬 고통스러워 보였다. 속눈썹을 치켜 뜬 두 눈은 떨리는 듯 보였다. 그러면서도 나와 눈만 마주치면 다시 기쁨으로 변모했다. 나는 이러다 오소마츠가 잘못되는 건 아닌지 강하게 짐작했다. 언젠가 오소마츠가 나에게 속삭였던 말이 떠올랐다. 너는 나의 모든 감정이야. 네가 느끼는 감정이 나의 전부이니 내가 너고 너또한 나겠지. 나는 떠오른 말을 오소마츠에게 그때처럼 말했다. 목소리에도 눈물이 고인다면 딱 이러할 것이다. 너는 나 자신이야.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든 너와 나는 같은 영혼이야.
그때 우리 둘의 사이를 갈라놓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침이 준비되었으니 식사하러 내려오라는 유모의 목소리였다. 나를 놓아주지 않고 끌어안는 오소마츠를 떼어놓았다.
" 다녀 올게."
나의 실낱 같은 목소리가 쪽방 안을 떠돌았다. 작은 문 밖으로 나갈 때까지 시선이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본 그의 표정은 절망스러웠다. 나는 그의 얼굴을 기억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떼어지지 않는 발을 움직여 테이블로 향했다. 어느새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그릇이 테이블에 가득했다. 내가 오는 것을 본 유모가 의자 하나를 뒤로 빼주었다. 내 몫의 그릇에는 방금 담은 듯 따뜻한 크림 스프가 보였다. 전혀 입맛이 돋지 않았던 나는 미적대며 의자에 앉았다. 잭은 나를 보고 음흉하면서도 수줍게 웃었다. 그가 또다시 부리는 수작에 나는 무척이나 불쾌했다.
"안녕, 나의 작은 아가씨. 방금은 그냥 가버려서 서운했어."
"...안녕."
남의 인사를 무시할만큼 예의없는 아이는 아니었기에 나는 고개를 숙여서 탐탁지 않게라도 대꾸했다. 그 모습을 본 아버지께서 나를 나무랐다. 나는 내가 왜 혼나야 하는지 몰랐다. 오늘따라 맛없어 보이는 크림 스프를 숟가락으로 휘휘 저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내 맞은편에 앉은 잭은 나를 쳐다보았다. 얼굴에 들러붙는 시선이 못마땅해 나는 어떠한 말도 꺼내지 못했다. 수치스러워 몸을 옹송그렸다. 아버지가 먼저 음식을 입에 가져다 대는 것을 보았다. 나를 향하는 눈빛을 모르는 체 하고 식사를 시작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입안에 눅진하게 달라붙는 크림 스프 때문에 체할 뻔했다. 내 얼굴이 꼴 좋게 창백해 졌는지 옆집 애가 유난을 떨며 자리에서 일어나 나한테 다가왔다. 쳐내고 싶었지만 나를 가엾게 바라보는 어머니의 얼굴 때문에 나는 그대로 굳었다. 어머니께서 나를 왜 저런 불쌍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는 거지?
그러는 동안 그가 냅킨으로 나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나는 쳐내지도 못하고 규칙적으로 숨을 내쉬었다. 메스꺼운 식사 자리에서 정신을 잃지 않으려는 내 나름대로의 발버둥이었다. 내가 괜찮아졌다고 판단한 건지 그는 냅킨을 내려놓았다. 잭이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지만, 곧장 희고 곧게 뻗은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건드리는 그의 행동에 당황했다. 나는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다물었다. 잡을 것이 필요해 당장에라도 날 다독이는 오소마츠의 손이 잡고 싶었으나 나는 미지근한 물이 담긴 유리잔을 세게 쥘 수밖에 없었다. 수치심에 온몸이 부들거렸다. 아무렇지 않게 아랫입술을 훑어내는 손가락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잔을 쥔 손가락이 희게 번졌다. 내가 아무말도 하지 못하는 것을 본 어머니께서 대신 그를 자리에 앉혀주셨다. 아쉬워하는 그가 멀어지고 나서야 나는 숨을 쉬었다. 깨트릴 것처럼 쥐고 있던 잔을 들어 물을 들이켰다. 그리고 옆집 애는 보는 척도 하지 않으며 크림 스프를 연신 떠먹었다. 지금 먹을 것을 당장 게워낼 정도로 부담스러웠고 나만 언짢아 하는 것 같은 식사 자리가 계속됐다. 이어진 아버지의 말씀에 나는 정말 졸도라도 하고 싶었다.
"너도 어느정도는 예상하고 있었겠지, 사희. 이전에도 잭과 꽤 잘 지내더구나. 우리 집안의 장미가 다른 곳에 피어야 한다는 사실은 참 슬픈 일이야. 하지만 인생에서는 피할 수 없는 일도 있더구나.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네 결혼식 날짜를 알려주마."
나는 들고 있던 잔을 놓쳤다. 투명한 물이 식탁보를 동그란 모양으로 적셨다. 깨진 유리 파편이 손가락을 파고 들었다. 선연한 빛깔의 피가 그릇에 떨어져 맺혔다. 맞은편에 앉은 바보같은 이가 또다시 벌떡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나는 대놓고 그를 보며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아버지께서 마지못해 잭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하셨다. 어떻게 내 의사는 한 번도 물어보지 않고 멋대로 정하실 수 있냐며 따지고 싶었다. 그렇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이지 못했다. 내가 떠나고 혼자 남겨질 오소마츠를 생각하자 가슴이 미어졌다. 내 결정과 상관없이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 결혼하게 되는 것보다 그게 더 믿겨지지 않았다. 내가 없는 오소마츠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안쓰러워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고요가 한차례 식탁을 지나갔다. 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울고 싶지 않았지만 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함박눈 같이 동그랗고 무게감 있는 눈물 방울이 식탁 위로 떨어졌다. 자존심이 상해 세운 이로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흐린 시야 너머로 조용히 눈물을 훔치시는 어머니가 보였다. 나는 나와 같이 울어줄 또다른 사람이 필요했다. 나는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그만 가볼게요."
"조금 더 앉아 있으려무나."
마치 너그러운 아버지를 연기하듯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으나 나는 딱 잘라 대꾸했다.
"싫어요."
"이런 버릇없는...!"
아버지께서 들고 있던 나이프를 식탁에 던졌다. 식탁 위에서 춤추듯 하는 나이프가 멈출 때까지 날카로운 마찰음이 계속됐다. 칼 끝이 내 신경을 긁었다. 홧김에 의자를 박차고 자리에서 벗어났다. 내가 앉아 있었던 의자가 바닥에 부딪쳐 큰 소리를 냈다. 그 소음을 뚫고 뒤에서 소리치며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계단을 밟아 뛰어내려오는 익숙한 발소리가 들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는지 오소마츠는 놀란 표정의 나를 단번에 안아 들었다. 나를 품에 안은 그는 제멋대로 밖으로 달려 나갔다. 분노에 소리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오소마츠는 듣지 못한 것만 같았다. 나는 감격해서 두 팔로 그의 허리를 붙들었다. 너는 나와 같이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오소마츠는 워더링 하이츠 부지 밖으로 순식간에 달렸다. 아침의 차가운 공기가 오소마츠와 나의 얼굴을 스쳤다. 그의 맨발이 마른 풀을 밟아서 버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발가락 틈새로 곱고 자잘한 흙이 파고들었다. 나를 안아든 이의 슬픔과 격정을 삼키는 거친 숨소리가 들렸고 눈물이 내 이마 위로 떨어져 흘렀다. 차가운 바람이 금세 눈물 방울을 데려갔다. 사희는 거세게 뛴 탓에 멀어져 점이 될 듯한 집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디까지 갈 거야?"
나에게 간절하게 속닥대는 오소마츠는 그럴리 없는데도 숨 한 번 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나랑 도망치자. 나랑 가자. 나는 네가 없으면 안 되는 거 알잖아. 육체는 살아 있겠지만 영혼은 빠져 아무것도 먹거나 마시지 못할거야. 어떻게 너와 내가 떨어질 수 있어? 나의 장미꽃. 너도 내가 아닌 다른 곳에 피어 있는 상상을 해본 적 있어?"
"오소마츠, 나는 너를 사랑해. 하지만 아픈 어머니를 두고 갈 수는 없어. 게다가 우린 달리 갈 곳도 없잖아. 그냥 나랑 여기 있자. 응?"
달리는 속도가 점차 느려져갔다. 오소마츠가 느릿하고 고통스러운 투로 말했다.
"...너의 부모님께선 자금 문제로 널 결혼시키려는 게 맞지. 고작 그따위 문제로 나의 전부를 내게서 떨어트려 놓으려고......"
나는 차마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고 날 안아 든 오소마츠가 천천히 무너져내렸다. 무성하게 핀 히스꽃밭에 두 무릎을 꿇었다. 오소마츠의 무릎에 짓밟힌 꽃과 줄기는 바닥으로 꺾였다. 흥분은 어디로 가고 비탄에 휩싸인 그의 두 눈은 폭풍처럼 일렁였다. 나는 슬픔에 젖은 그를 두고 혼자 돌아갈 수 없었다. 위로해 줄 작정으로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하니 그가 애원하며 나를 껴안았다. 그의 목구멍에서 가로막힌 울음소리가 바람소리 사이로 스쳐 들렸다.
작고 빼곡하게 난 히스꽃들이 잔잔하게 흔들렸다. 입은 흰색 옷이 더러워지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으며 나를 세게 끌어안는 그의 뜻대로 가만히 있었다. 바짝 붙어 있으니 격렬하게 요동치는 그의 심장 소리가 전해졌다. 깨진 컵에 상처를 입은 내 손가락을 오소마츠가 살폈다. 피가 흐르다가 어느새 굳었다. 그가 손가락을 자신의 입가로 가져다 대고 발갛게 부은 곳을 핥아내자 나는 눈을 찡그렸다. 붉은 피가 그의 혀끝에 묻은 모습이 마치 악마의 혓바닥처럼 새빨갛게만 보였다. 부러 미소지으며 내 뺨에 입맞추는 그의 눈동자 안의 깊은 갈구가 엿보였다. 나는 손을 뻗어 오소마츠의 머리에 대었다. 나는 그의 푸석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손길이 옆이마와 눈가를 지나고 마지막으로 뺨에 닿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에 입맞췄다. 그것으로는 모자라 얼굴에 다섯 번이나 키스를 퍼부었다. 설움에 물든 오소마츠가 나의 이마에 제 이마를 대었다. 속눈썹 위에 입맞춰주니 그가 참고 있었던 눈물을 쏟았다. 나에게 흐른 그의 눈물 때문에 시야가 아른거렸다. 오소마츠가 그토록 맹목적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런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멀리서부터 역정을 내며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오소마츠는 다시 일어섰다. 여전히 나를 껴안고 성치 않은 발로 언덕길을 내달렸다. 두들겨 맞은 곳이 욱신거리는지 곧이어 그가 절뚝거렸다. 나는 오소마츠의 품에서 벗어나면 마주하게 될 현실이 두려웠다. 그래서 그의 품에 얼굴을 묻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내 불행은 곧 너의 불행이야. 처음부터 나는 그것을 보고 느꼈어.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이 너야. 세상 모든 것이 사라져도 너만 있다면 나는 살아갈 수 있어.
오소마츠의 몸이 뒤로 기우뚱 기울어졌다. 나는 볼 수 없었으나 아마도 아버지의 손아귀에 목덜미를 잡히고 만 것이리라. 바닥에 쓰러진 오소마츠의 위로 나또한 같이 엎어졌다. 나는 억센 손에 잡혀 순식간에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알아서 두 발로 돌아가겠다고 죽어라 소리를 쳐 댔으나 아버지는 듣지도 않았다. 오소마츠는 넘어지자마자 곧장 일어나 나를 붙잡으려고 했다. 나도 그에게 손을 뻗었으나 역부족이었다. 아버지를 뒤따라 온 하인 두 명이 오소마츠의 손을 거세게 쳐냈다. 그들은 애달프게 내쪽으로 손을 뻗으며 발버둥치는 오소마츠의 양쪽 팔을 옥죄고 나와는 반대쪽으로 끌고갔다. 죄인을 호송하는 장면이 꼭 그러했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팔을 붙잡혀 끌려갔다. 내 발뒤꿈치가 언덕길에 불규칙적인 흔적을 아로새겼다. 오소마츠가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며 외쳤다.
"가지 마, 가지 마...!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장미야, 제발 가지 마! 나에게 돌아와! 나를 두고 살아가겠다는 말은 하지 마. 나를 죽이지 마..."
모든 희망을 놓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식사 자리에서보다 서럽게 울음을 터트렸다. 눈꺼풀을 비집고 나와 흐르는 눈물은 추위에 얼어붙었다. 나는 더이상 어떠한 힘도 낼 수 없어 멍청한 표정으로 잡혀가기만 했다. 빠져나갈 수 없는 손에 잡혀 매섭게 발버둥치는 그가 언덕의 굽이에 가려졌다. 눈을 아무리 크게 뜨고 너머를 내다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집에 혼자 돌아왔다.
아버지로부터 내 결혼 전까지는 외출 금지령을 받았다. 나를 걱정하고 있던 건지 문 앞에 서 있던 유모가 아버지에게서 나를 건네 받았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유모를 붙잡고 오소마츠를 데려와 달라 애걸했다. 유모는 나를 난롯가로 데려가며 그럴 수 없다는 말과 함께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초라한 내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아내 주었다. 내 눈물이 멎지 않는 탓에 유모가 내 얼굴을 아무리 닦아내어도 소용없었다. 그 망할 놈의 잭이 걱정스럽게 말을 걸자 나는 그의 발치에 침을 뱉었다. 그러나 잭은 너의 아버지께서 이 장면을 보지 못해 다행이라고 할 뿐이었다. 잭이 나를 위로해 주겠다고 내 방으로 따라 들어오려고 하길래 밀쳐내었다. 어머니께선 내가 진정하고 나서 찾아오는 게 좋겠다며 잭을 돌려보냈다. 나는 방에 틀어박혀서 혹시라도 오소마츠가 보일지 몰라 창밖만 내다보았다. 유모가 가져오는 점심은 물론 저녁 식사도 마다했다. 유모는 그런 나를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것 같았다. 달이 기울고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된 하루가 지나갔다.
그 이후로 오소마츠는 워더링 하이츠에 돌아오지 않았다.
네가 떠난지 삼 년이 흐르고 어느새 스물둘이 된 나는 갈수록 야위었다. 유모가 내 검은색 머리카락을 올려 묶어주고 있었다. 퍽 다정한 손길로 마무리를 짓고 나서 거울을 내 쪽으로 돌려주었다. 세로로 긴 원형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말라서 초라했다. 내 영혼은 지금의 나보다 더 마른 가시 나무가 자라던 워더링 하이츠에 가 있었다. 정신은 온통 그곳에 팔려 있었다. 쇄골이 드러나 보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나는 유모에게 두꺼운 숄을 부탁했다.
오소마츠가 날 떠난 이후로 나는 한 번도 제대로 잠에 든 적이 없었다. 눈을 감으면 나에게 가지 말라고 빌던 오소마츠가 보였다. 나는 그것이 그리도 슬퍼 나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기도 했다. 나는 결혼을 하고 변했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대해 과하게 슬퍼하거나 짜증냈다. 밤마다 실내화를 벗어던지고 맨발로 춤을 추듯 복도를 돌아다녔다. 예전보다 추위를 잘 타게 되어 잔병치레를 하는 일도 잦아졌다. 어느날은 갑자기 쓰러져 의사를 부르니, 심각한 스트레스가 쌓여 병의 원인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오소마츠가 나에게 돌아올지를 생각하며 겨우 그 시간을 버텼다.
나는 워더링 하이츠를 향해 나 있는 창문 앞에 앉아 있는 것을 좋아했다. 내가 안락 의자에 앉을 때면 유모가 벨벳 담요를 무릎에 덮어주었다. 내가 아주 어려서 네 발로 기어다니던 시절부터 내 곁을 지킨 유모까지 옆에 없었다면 나는 진작 무덤에 묻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늘 유모의 호의에 감사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까탈스럽게 굴어도 남편 잭은 나를 상냥하게 대해줬다. 유모를 통해 내가 장미꽃을 좋아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날에는 내게 장미꽃다발을 선물해주기도 했다. 빽빽하게 꽃힌 장미꽃들이 아름답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워더링 하이츠 주변에 둘러놓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기쁘지 않았지만 미소지었다. 멍청한 잭은 내가 정말로 기뻐하는 줄 알았겠지.
나는 시간이 흐를수록 고장나는 내 몸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알 필요가 있었다. 그랬기에 멀지 않은 과거에서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내 방 서랍장 한 구석을 차지한 인조가죽을 겉표지에 덧댄 일기장을 꺼냈다. 워더링 하이츠에서 지낼 때부터 가지고 있던 것이라 꽤 해어져있었다. 어머니께 선물 받았던 것이라 차마 쓰지 못하고 있던 일기장이었지만 더이상 아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머니께선 오소마츠가 떠나고 나서 얼마 안 가 돌아가셨다. 당신의 뜻대로 행복하게 살고 있지는 못했지만 나는 어머니를 영원히 기억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다. 낡은 일기장은 나와 당신을 잇는 매개체나 다름 없었다. 나는 펜촉에 잉크를 묻히고 글을 써내려갔다.
내가 일기를 적는 동안 유모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최근 들어서 나는 일기 쓸 때 방해받는 것을 끔찍하게도 진절머리나 하게 되었다. 나는 유모의 목소리는 못 들은 척 하고 신경질적으로 의자에서 일어나 머리를 식힐겸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내부로 끼쳐들어오고 나는 눈이 따가워 길게 깜박였다. 그 잠시에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던 것 같았지만 이유는 알지 못했다. 이상하도록 밖이 어수선했다. 나는 그 원인을 제 발로 찾을 정도로 활기차지 않았기 때문에 내 머릿속은 주방으로 가 다즐링 한 잔을 마시자는 생각으로 가득찼다. 방에서 나와 주방 쪽으로 발길을 돌리자 나는 복도 끝에 서 있던 유모와 눈이 마주쳤다. 유모는 발걸음을 빠르게 재촉해 나에게 왔다. 어찌나 급해 보이는지 유모는 나에게 도착하자마자 내 손을 잡고 걸었다. 그다지 내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유모가 가는 방향대로 따라 걸어갔다.
"손님이 기다리고 계세요."
"무슨 손님이길래?"
내가 영문도 모르고 따라가는 동안에 유모는 싱글벙글거리며 혼자 들떠 있었다. 그러나 그 의문도 잠시 푹신거리는 카펫이 깔린 복도를 지나 현관문 앞에 도착하자 얼굴의 온 근육이 상기되어 꿈틀거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굳은 걸 확인한 유모는 웃음소리를 내며 주방으로 걸어갔다. 워더링 하이츠 근처의 언덕에 히스꽃이 아니라 장미꽃이 자란다 해도 이보다는 놀라지 않을 것이었다.
닫힌 현관문 앞에 네가 서 있었다. 삼 년이나 지났지만 알아보지 못할리가 없었다. 나와는 다르게 너는 어렸을 때보다 키가 컸다. 키뿐만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성장했다. 몇 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오직 나만을 바라보는 검은색의 눈을 마주했다. 그 두 눈은 나와 떨어져 있는 중에서도 나만을 바라봤으리라 믿게 만들었다. 벅차오르는 감정이 들끓자 나는 더이상 그때처럼 멍청하게 굴 수 없었다. 나는 오소마츠에게 달려가 그를 단번에 끌어안았다. 말끔하게 차려 입은 오소마츠는 특유의 난처한 웃음소리를 내며 상처 하나 없는 매끈한 손으로 나를 마주안았다. 나의 등허리에 그의 따뜻한 손이 닿았다. 우리는 한참 동안이나 서로의 품에 안겨 재회를 맛보았다. 나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오소마츠의 안정된 숨소리가 들렸다. 광활한 우주에 나와 오소마츠만 남겨진 것 같았다. 그의 양쪽 뺨을 감싸 잡고 들어올려 나를 바라보게 하자 오소마츠가 웃음지었다. 열기가 꺼지지 않은 눈동자에서는 오히려 예전보다 깊은 무언가가 타올랐다. 나는 오늘 밤에는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이라 느꼈다. 오소마츠가 부드럽게 물었다.
"잘 지냈어?"
"날 떠나 놓고 잘 지냈느냐 묻다니!"
나는 구시렁거리며 그의 물음에 답했다. 오소마츠를 다시 볼 수 있어 기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나를 떠나버린 네가 지금은 미웠다. 투덜거림의 이유를 아는지 오소마츠는 웃음기 넘치는 얼굴로 다시 물었다.
"그럼 질문을 바꿀게. 내가 보고 싶었어?"
뻔뻔한 투로 말하자 나는 괜히 화가 돋아 조용히 쏘아붙였다.
"그걸 말이라고 해?"
내 대답을 듣지도 않은 오소마츠가 신경쓰지 않는다는 낯으로 말했다.
"나도 보고 싶었어."
제멋대로 내 입술 밖을 삐져나오는 투덜거림을 뒤로 하고 나는 오소마츠의 정강이를 발로 찼다. 그건 나를 두고 훌쩍 떠난 오소마츠에 대한 일종의 화풀이였다. 나는 그가 몹시 괘씸했다. 오소마츠는 얼굴을 찡그리고 신음을 내뱉었지만 나를 안은 팔은 풀지 않았다.
잭이 언제 이쪽으로 올지 몰라 내가 빠져나가려하자 오소마츠는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더 붙잡지 않았다. 그의 눈은 나를 꿰뚫을 것만 같았다. 오소마츠는 내게 닿은 두 손으로 얼굴의 모든 곳을 감싸잡았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마른 내 얼굴을 더듬었다. 손가락은 턱을 지나 목으로 내려가 쇄골에 닿았다. 툭 튀어나온 뼈의 선을 따라 어깨까지 훑어가는 동안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안타깝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까 싶었다. 나는 조용해진 분위기를 풀어보기 위해 간지럽다고 웃었지만 오소마츠는 웃지 않았기에 나도 저절로 입을 다물게 되었다. 그때 유모의 목소리가 들렸기에 오소마츠는 나를 만지던 손을 거두었다. 나는 여전히 나를 끈적하리만치 고집스럽게 바라보는 오소마츠의 눈길을 떨치려고 노력했다.
"애덤스 부인, 주인 어른께서 손님방에서 기다리세요. 오소마츠 씨도 안내해드릴까요?"
유모의 말을 들은 오소마츠의 눈빛에 순간 날이 서렸다. 그는 비꼬는 말투로 빈정거렸다.
"...애덤스 부인이라... 그래, 결혼했다고 했지. 장미가 꽤 우스꽝스럽게 불리네."
그의 한 마디에 유모가 목소리를 높이며 성난 티를 숨기지 않았다.
"아무리 오소마츠 씨여도 주인 어른을 모욕하는 건 참을 수 없어요!"
내가 잭과 결혼한 뒤 유모도 나를 따라 드러시 크로스로 왔다. 잭 애덤스의 바르고 곧은 성품 때문인지 아마도 유모는 잭에게 푹 빠진 것 같았다. 나는 유모보다 잭을 잘 아니 그가 보여주는 모습이 전부가 아닐거라고 믿었다. 오소마츠는 사과도 하지 않고 특유의 태연한 미소를 지으며 유모를 지나쳐 먼저 걸어가버렸다. 나는 오소마츠 대신 사과했다.
"미안, 못 본 사이 꼬일 대로 꼬여가지고 돌아왔나 봐. 나라도 사과할 테니까 유모가 이해해 줘."
"괜찮아요. 나이를 먹더니 요즘 화가 많아졌나 봐요. 주인 마님께서 사과할 일은 아니랍니다."
나는 마음씨 곱게 이해해주는 유모에게 감사를 표하며 응접실로 향했다. 오소마츠는 유모의 안내도 없이 방 위치를 어떻게 알았는지 이미 응접실에 갖추어진 길쭉한 소파에 앉아 등받이에 편안히 등을 기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맞은편에는 잭이 앉아 있었다. 나는 왠지 모르게 부담감에 눌려 응접실로 어정쩡하게 걸어갔다. 오소마츠의 고개가 완전히 내쪽을 향해 움직였다. 설명할 수 없을 법한 묘한 기류가 흘렀다. 나는 내가 매일 앉아 있곤 하는 난롯가의 안락의자에 앉았다. 잭의 낮은 목소리가 응접실의 바닥에 깔렸지만 오소마츠는 꼼짝하지 않고 나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아예 상체를 내 쪽으로 돌렸다. 아마 그것을 탐탁지 않아 할 잭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인과 친한 사이셨지요."
"그렇습니다."
오소마츠는 대화를 이어갈 생각 따위는 없는건지 간결하게 묻는 말에만 대답했다. 정말이지 그가 나를 바라보는 열렬한 시선 때문에 나의 몸에 구멍이 뚫리는 건 아닐지 생각했지만 나또한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다.
이어지는 잭의 물음에 오소마츠는 고개를 젓거나 끄덕이는 식으로만 대응했다. 내가 보기에도 그런 오소마츠의 모습에서 예의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떠난 이후 삼 년간 무슨 일이 있었기에 부자가 되어서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건지는 아무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것에 대해서 묻자 하면 오소마츠는 비밀이라며 말을 끊어내었다. 누구에게도 알려줄 생각 같은 건 없어보였다.
드러시 크로스 저택의 주인은 목이 타는 건지 나에게 차를 대접하라 부탁했다. 나는 온갖 신경을 오소마츠에게 집중하느라 잭의 말을 듣지 못했다. 내가 차를 내오러 일어나지 않자 잭은 했던 말을 또 했다. 그제서야 정신이 번뜩 든 나는 안락의자에서 일어나 소파 근처 테이블로 가 준비되어 있는 다즐링이 담긴 주전자를 들어 두 개의 찻잔에 따라내었다. 그동안에도 오소마츠의 눈빛은 내 뒤를 쫓았다. 나는 그들의 앞에 찻 잔을 하나씩 놓아주고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잭은 홍차를 좀 마셨지만 오소마츠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대화는 전혀 진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침묵을 깨고 말했다.
"잭, 오소마츠는 나와 친한 친구니까 당신도 오소마츠와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내 말에 잭은 헛기침을 한 번 하였다. 내가 고개를 돌려 잭을 쳐다보는 것과 동시에 오소마츠가 굳게 다물고 있던 말문을 열었다.
"워더링 하이츠의 주인 어른은 아직 살아계셨어. 주인 마님 대신 돌아가셨어야 했는데, 오히려 잘 됐지. 복수할 기회가 남았으니까."
복수를 하겠다는 그의 말은 어렸을 때 종종 들어왔었다. 그랬기에 나는 놀라지 않고 그에게 물었다.
"복수를 끝내면 무엇을 할 건데?"
"무엇을 할까......"
내 질문에 오소마츠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띈 미소를 내어보였다. 진득한 시선이 상냥하게 내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오소마츠가 무언갈 더 말하려던 참에 잭이 먼저 선수치듯 말했다.
"재회는 충분히 하신 것 같은데, 이만 돌아가시죠."
오소마츠는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따라 준 홍차는 그 상태 그대로였다.
"재촉하지 않으셔도 그러려던 참이었습니다."
나를 바라보던 예사롭지 않은 시선이 이내 거둬졌다. 나는 겉옷을 여미고 현관으로 나서는 그에게 인사하다 붙잡고 말했다.
"머물 곳은 있어? 이곳에 남는 방이 있는데."
"아... 워더링 하이츠에서 나에게 방을 하나 주기로 했어. 당분간은 그쪽에서 머무를 생각이야."
복수를 다짐한 상대와 한 집에서 산다는 게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오소마츠는 내 예상 밖의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많았기에 이번에도 그런 것이겠거니 생각했다. 나는 다시 물었다.
"워더링 하이츠?"
"응. 내가 여기 계속 있으면 장미도 부담스럽잖아. 너무 아쉬워는 마. 종종 놀러올게."
우리 둘의 뒤를 따르던 잭이 고의적으로 소리를 내며 기침했다. 오소마츠는 내 손등에 입맞추려다 말고 미소지으며 저택 밖으로 나갔다. 나는 곧장 창문이 나 있는 곳으로 가 그의 모습이 더이상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시선으로 쫓았다.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오소마츠는 종종 뒤로 돌아 두 손을 흔들며 나에게 인사했다. 오소마츠가 워더링 하이츠로 걸어 가는 동안 그런 인사를 네 번은 주고 받았다. 모든 것이 달라진 기분을 체감했지만, 장난기 넘치고 제멋대로인 그의 성격 만큼은 여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가 무슨 생각으로 어떤 복수를 하기 위해 이곳에 돌아왔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오소마츠와 재회 후 반 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오늘 아침까지는 모든 게 평소와 같았다. 드러시 크로스로 뛰어오는 유모의 치맛자락이 바람에 날려 펄럭였다. 나는 짐작가는 바가 있었다. 나의 아버지, 워더링 하이츠의 주인 어른이 돌아가셨다는 전갈을 가지고 오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버지는 두 달 전부터인지 화병에 시달리는 것 같았다. 내가 모르는 다른 병이 더 있었을지도 몰랐다. 이유불명이었지만 나는 원인이 오소마츠리라고 예상했다.
오소마츠가 돌아온 이후 나는 그와 자주 만났다. 그는 어떤 날엔 무척이나 행복해 보이는 낯으로 내게 달려왔고, 어떤 날엔 온몸이 궐련 냄새에 찌들어 쓴내를 풍겼다. 다른 날에는 그가 슬픈 건지 기쁜 건지 전혀 가늠할 수 없었으며, 또다른 날에는 얼굴이 퀭한 것이 밤을 샌 게 분명해보였다. 그리고 어젯밤에는 그가 분명히 즐거워보였다. 주인 어른의 죽음이 그에게는 몹시 행복한 경사였을테다.
침울해 보이는 유모와 함께 나는 워더링 하이츠로 향했다. 잭은 오소마츠가 돌아온 뒤로 내가 그곳에 가는 것을 꺼려 했지만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고 하니 막지 않았다. 유모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걷다보면 금방이었다. 유모는 내 아버지께서 사업으로인한 재산 탕진의 충격 때문에 돌아가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찾아간 워더링 하이츠는 전보다는 더 낡았고, 하인의 수도 줄어보였다. 문에 기대 서 있던 오소마츠는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 같았다. 나를 마주하자 표정이라고 찾아볼 수 없었던 그의 얼굴에는 순식간에 따뜻함이 번졌다. 애도를 표해야 할 터인데 그는 나를 껴안고 볼에 입맞추며 환영인사를 했다. 오소마츠는 그 어느 때보다 잠을 잘 잔 사람같았다. 오소마츠는 친절하게 문을 열어 유모를 안으로 안내했다. 유모가 2층으로 올라가자 오래된 계단에서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한참이나 나를 바로 보던 오소마츠는 내 손을 잡아 바깥으로 이끌었다.
나는 그에게 이끌려 언덕의 끝, 절벽 가까이에 다다랐다. 내리쬐는 낮의 햇살이 오소마츠와 내 주변을 비췄다. 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나부꼈다. 내가 기침하자 그가 급하게 겉옷을 벗어 내 어깨에 둘러주었다. 그를 살인자라 짚은 내가 진지하게 물었다.
"...복수라는 게 살인이었어?"
신중한 내 질문에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나는 그런 적 없어. 혼자 죽음을 초래하도록 부추겼을 뿐이지. 주인 어른께서는 못 본 사이에 더 멍청해지셨더군."
오소마츠의 태연한 답변에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맹렬한 바람에 엉키는 머리카락을 몇 번이나 정리할 뿐이었다. 내 얼굴이 일그러졌는지 오소마츠는 금방 슬픈 표정을 지었다.
"장미야, 날 그렇게 바라보지 마. 네 시선 하나하나가 날 어떻게 만드는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애틋하게 속삭이는 그는 명백한 사랑에 빠져 있었다. 오소마츠는 자신보다 타인을 위하게 되는 어리석은 감정에 종속되었다. 오소마츠 없이 지내야 했던 삼 년간의 고독이 지나고 그의 애정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나는 그가 복수를 할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살인에 가까운 것일지는 몰랐다. 내가 나보다 더욱 사랑하는 그가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면 나또한 그렇게 되는 것일지 생각했다. 침묵이 이어지자 아까까지만 해도 행복하던 그의 낯은 온데간데없이 초조함으로 물들었다. 오소마츠는 나를 껴안고 따스하다 못해 뜨거운 두 손이 열렬하게 허리를 휘감아 안았다.
"더이상 나를 괴롭게 하지 말아줘. 네 곁을 떠난 이후 나는 종일 외로웠어. 나는 네가 없는 지옥 속에서 너를 다시 만나기 위해 살아남았어. 너와 함께 있지 못하는 동안 네 생각만을 했어."
내 뺨에 따뜻한 눈물이 흘렀다. 내가 우는 것이 아니었기에 이것은 그의 눈물이라 생각했다. 뺨을 마주대고 연신 문지르던 그가 감정에 북받쳤는지 말이 끊겼다. 나는 그를 달래줄 심산으로 등을 토닥였다. 이럴 때면 꼭 그는 내게 어린아이처럼 안겼다. 부드러운 그의 머리카락이 내 얼굴 곳곳을 스쳤다. 나는 달래는 투로 말했다.
"오소마츠, 나를 여기로 데려온 이유는 뭐야?"
나를 안은 그의 팔이 점차 느슨해졌다. 강한 바람 탓에 눈물이 말라 뺨에 들러붙었다. 오소마츠는 잔잔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한차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가 고요해진 언덕과 같았다.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그의 검정색 눈에 내가 아른거렸다. 그는 마른 입술을 몇 번이고 붙였다가 떼기를 반복했다. 슬픔에 젖은 낯은 점점 간지러운 쑥스러움으로 변했다. 그럼에도 불안함이 고개를 들었다. 오소마츠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게서 도망치지 않을 거지?"
"...오소마츠."
"전에는 바로 대답을 들었는데~."
마치 내가 무슨 말을 더 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이 그는 말을 빠르게 이었다. 그의 손이 나에게 둘러 준 자신의 겉옷 쪽으로 향했다. 겉옷의 안주머니에 쉽게 손을 넣고 꺼낸 것은 다름 아닌 반지 케이스였다. 오소마츠는 잡초 따위가 날리는 지면에 한쪽 무릎을 꿇더니 케이스를 열어 보였다. 장미 모양으로 세공된 보석이 장식된 겉보기에도 아름다운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구름에 가려져 어렴풋하게 떨어지는 볕이 보석의 표면에 닿아 부서졌다. 그가 목소리를 가다듬는 소리가 들렸다.
"이날만을 기다렸어. 널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날,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날."
오소마츠는 내가 승낙하기를 기다리며 잠시 말을 멈췄지만, 나에게서 아무런 반응도 오지 않자 급하게 말을 이었다.
"...이혼하는 건 내가 도와줄게. 저런 놈은 널 사랑하는 게 아니야. 나에게서 널 빼앗아 간 개자식... 워더링 하이츠의 주인 어른 다음으로는, 그에게 복수하려고 했어! 건들지 말았어야 할 것을 감히 넘본 죄야. 설령 이혼하지 못하더라도 그는 곧 죽을 텐데 그런 게 무슨 대수지?"
두 번째의 무거운 침묵이 지났다. 그는 형식적으로 끼운 나와 내 남편과의 결혼 반지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여러 감정이 섞였을 그 표정은 나조차도 가늠하기 힘들었다. 나는 바람에 날리는 치맛자락을 두 손으로 그러잡아 모을 뿐이었다. 오소마츠는 기다리기 힘든지 애원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발 나를 사랑한다고 해줘..."
목소리에 슬픔이 담긴다면 이마저도 애달플 것이었다. 지독하게 쓴 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오소마츠의 안면은 금방 슬픔으로 망그러졌다. 나는 그의 괴로운 낯을 정말이지 더이상 볼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를 일으켜 세워주곤 단숨에 끌어안았다. 내 품에 들어온 그는 규칙적으로 숨을 쉬며 나를 마주 안았다. 나의 어깨 부분에 그의 숨이 늘어뜨려졌다. 오소마츠가 따뜻한 두 손으로 나의 등을 쓸어만졌다. 가볍게 톡 건드리듯 했다가 망설임이 담긴 손짓으로 부드럽게 대하는 손길은 늘 안정되었다.
"오소마츠."
"응."
나의 부름에 그는 어리광부리며 내게 달라붙었다. 간격이 좁아지고 이번에는 목에 오소마츠의 입술이 닿았다. 나는 그를 달래며 말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게 살인까지 덮어주겠다는 말은 아니야."
"...나는 복수를 했을 뿐이야. 게다가 내가 죽인 것도 아니고. 내가 어떻게 자랐는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나는 너를 잃고... 제정신이 아니었어. 어쩌면 단단히 미쳐버렸을걸. 그러니까 그보다, 나와 함께 하겠다고 해줘. 신경쓰이게 한 점은 미안해. 사과할게. 그러니까 나와 함께 있겠다고 해줘."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내가 보기에 오소마츠는 그가 직접 말한 것처럼 제대로 미쳐버린 것 같았다. 어린 시절의 고단한 기억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 끝내는 네게 돌아올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사람이 아닌가.
나는 점점 격한 음성을 내뱉는 오소마츠에게 다정하게 말했다.
"알겠어. 진정해 오소마츠. 네가 죽이지 않았다고 믿을게."
"고마워. 그 자식은 그냥 지독한 니코틴과 알코올 중독, 그리고 전재산을 탕진했다는 것에 절망해서 죽은 거야."
그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그건 몰랐는데."
"도박을 일삼았거든."
그리고 오소마츠는 말을 더 잇지 않았지만, 그가 돌아온 뒤로부터 아버지의 건강이 점차 나빠졌다는 것으로 보아 나는 오소마츠가 개입되지 않은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달리 말은 꺼내지 않았다. 오소마츠가 나의 아버지에게 복수하겠다는 말은 이미 어렸을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종종 너덜한 다이어리를 꺼내들고 어떻게 복수하는 게 썩 괜찮을지 구상했고, 나는 그에게 동조했다. 그 시점에서부터 나는 이미 할 말이 없는 것이다. 펜을 잡은 멍이 든 손가락을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종이 위에 사각거리는 소리를 남기던 오소마츠는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미소지었다.
먼지 이는 쪽방에서 상처 입은 팔을 가리며 나를 보고 웃었던 날. 벌어진 상처에 햇빛이 스며들어 그것이 따갑다고 입김을 불어주면 괜찮아질 것 같다고 했던 날. 덧난 상처에 내가 입맞추자 피묻은 내 입술에 키스했던 날.
어느날은 오소마츠에게 열이 나 아버지께 달려갔는데 옮을 수 있으니 가까이 가지 말라는 말만 들었다. 유모는 하필 필요한 식료품을 사러 자리를 비운 사이였다. 하인들은 다들 각자의 일을 하느라 바빠 내 말은 들어주지 않았다. 나는 울면서 아버지를 붙잡고 의사를 불러달라고 청했으나 돌아온 건 무시였다. 거칠고 정돈되지 않은 땅, 워더링 하이츠 부근의 히스 꽃이 피는 언덕. 나는 비가 왔던 그 날, 길을 따라 기머튼으로 혼자 뛰어갔다. 의사를 불러오는 건 성공했지만 결국 다음 날에는 내가 감기에 걸렸다. 그럼에도 오소마츠가 곧 나았다는 것이 기뻐 후회하지 않았다. 그가 아픈 것보다 내가 아픈 것이 좋았으니, 세상이 오소마츠를 비난해도 나는 그를 두둔할 수밖에 없을 운명이었다.
나의 생각에 온점을 찍듯이 오소마츠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불안을 느꼈으리라.
"...괜찮아? ...그, 천천히 결정해도 돼. 나랑 결혼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이제와서 말해도 설득력 없어."
"...미안."
연신 사과하는 그에게 괜찮다고 답했으며,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우리는 대화를 마무리지었다. 나는 겨우 그와 함께 워더링 하이츠로 다시 돌아갔다. 장례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아버지의 장례식 날이 지나고 한 달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나는 그날 오소마츠가 내민 반지를 결국 거절하지 못했다. 나는 열린 창 틈 사이로 들어오는 볕에 반지의 붉은 부분을 비춰보았다. 잘 깎인 피처럼 검붉은 루비는 자신에게 부딪치는 빛에 존재감을 뽐냈다. 우리는 결국 이렇게 될 운명일 뿐이었다. 몇 번이나 길이 어긋난대도 종극에는 한 길을 걷게 되는 운명이었고, 손을 맞잡고 서로의 가장 가까운 곳에 서로가 있다는 사실 하나로 감격하는 삶을 지샐 운명이었다.
나는 오소마츠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대신 조건을 붙였다. 잭 애덤스를 어떠한 방법으로라도 압박하면 안 된다는 것과, 불법에 해당하는 행동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 그 조건이었다. 내 조건에만 따라준다면 시간이 걸려도 꼭 네게 돌아가겠다고 약속했다. 오소마츠는 내 말에 그저 웃음으로 답했다. 그리고 내 오른손 약지에 반지를 끼워줄 뿐이었다.
다시 돌아오자면 나는 잭 애덤스와의 이혼에 꽤 난항을 겪고 있었다. 단순한 이유지만 그는 나를 무척이나 아꼈기 때문이었다. 끝내 마음을 얻지 못해 나의 부모를 꼬셔 자금으로 나를 사듯이 데려온 그는, 결혼 후 한 번도 내 앞에서 목소리를 높인 적이 없었다. 나는 오소마츠가 워더링 하이츠로 돌아온 뒤부터 나의 마음이 한층 돌아섰다는 걸 잭이 직감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나갈 채비를 할 때마다 어딜 가는 것인지 꼬치꼬치 캐물을 이유가 없을 것이었다. 그맘때 오소마츠에게서 항상 났던 궐련 냄새가 나에게 옮겨온 날이면 더욱 그랬다.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나를 향한 잭의 사랑은 시간이 흐를수록 변했다. 워더링 하이츠의 언덕과 제법 떨어진 절벽을 바다가 밀어쳐 점차 뾰족하게 깎이는 것처럼 잭의 마음 또한 예리하게 날섰다.
이제는 화를 내지 않는 날이 없었으며 취조하며 묻지 않는 날 또한 없었다. 내가 이혼 이야기를 꺼낼 때면 들고 있던 찻잔을 바닥에 집어 던지기 일쑤였다. 잭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나의 시선은 늘 오소마츠를 쫓았다. 그는 조바심과 불안감에 예전과 같이 여유롭게 굴지 못했다. 나는 변한 잭 애덤스를 충분히 이해했다. 오소마츠를 잃고 난 뒤의 내가 어떻게 변했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나조차도 두려움을 뼈에 새길만큼 명백하게 알고 있었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나는 그를 설득하기 위해 오소마츠와 만나는 날을 줄였다. 워더링 하이츠 근처에 앙상하게 자란 가시 나무 앞에서 그 이야기를 전했을 때에는 오소마츠가 몹시 슬퍼하는 기색을 보였다. 나는 한동안 마음이 편하지 못했고 단 한숨도 제대로 잔 적이 없었다. 오소마츠와 이별하고, 잭과 결혼한 뒤보다 한층 심했다.
오소마츠는 누구보다 나를 잘 알기에 내가 불안정한 상태에 놓였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내가 별일 아닌 일로 화를 내도 그는 내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나의 어머니처럼 스트레스가 쌓이면 급속도로 건강이 악화되는 게 분명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오소마츠가 걱정할 것 같아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았다. 게다가 최근 들어서 더욱 그와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내 상태를 알지 못했다.
오소마츠의 청혼을 받아들인지 두 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나는 여느때처럼 침대에서 일어나 시린 어깨에 두터운 숄을 걸치고 거실로 나갔다. 오늘따라 저택이 한산했다. 싸늘한 바람이 부는 내부를 헤치고 나아가 잭을 찾았다. 걷다가 마주친 복도에 붙은 거울 안에는 제대로 정돈이 되지 않아 붕 떠 엉망인 내 머리카락이 보였다. 나는 잠시 멈춰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빗었다. 손가락에는 뽑힌 머리카락이 꽤 많이 걸려 나왔다. 그것들을 멍하니 보고 있을 때 잭의 목소리가 들렸다.
"...또 나갈 건가?"
"아, 잭. 할 말이 있어요."
"이혼이겠지."
비아냥거리는 잭의 말에 부정을 할 수 없어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꾹 다물었다. 잭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내 양쪽 어깨를 두 손으로 콱 잡아 벽에 밀어붙였다. 순식간이었다. 내 등이 둔탁한 충격음과 함께 벽에 부딪치자 나는 놀란 표정을 하며 낮은 신음을 뱉었다. 나는 짜증과 불안함이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게 뭐하는 거예요!"
분노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잭에 의하여 집안의 모든 공기가 바닥에서 스멀스멀 기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진득한 공기가 복사뼈를 훑고 지나가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잠깐 표정을 푼 그는 마치 내가 지금이라도 이혼을 하지 않겠다고 말할 시간을 주는 것 같았다. 그런 그의 바람과는 달리 내가 아무말도 하지 않자 돌변한 잭이 커다란 오른손으로 나의 뺨을 내리쳤다. 짝, 하는 파찰음이 나와 잭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는 복도에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고개가 돌아간 나는 몇 초간 무슨 생각도 하지 못했다. 맞은 뺨이 얼얼하게 부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터진 볼 안쪽 여린살에서 쓴 피가 배어나왔다. 피는 목구멍을 타고 화끈한 감각을 남기며 넘어갔다. 나는 당황감에 정신을 놓은 사람처럼 멍청한 표정으로 잭을 응시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그는 나보다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나를 세게 껴안더니 서재로 도망치듯 들어가버렸다. 나는 그 이후로 꽤 한참 동안을 그 자리에 서서 상황 파악을 해야만 했었다.
나는 아직 얼얼한 충격을 잊으려 노력하며 겉옷을 챙겨 입고 오소마츠와 만나기로 한 곳으로 향했다. 특유의 흐리고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에 이번에도 우산을 챙겼다. 요즘따라 언덕을 오르는 일이 벅찼다.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머리까지 울리고 가슴이 답답해 몇 번이나 멈춰 서서 숨을 들이켜야했다. 싸늘한 공기가 폐부에 가득 찼다. 한기 때문에 문득 기침을 하자 기도가 잘게 쪼개지는 고통이 느껴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입술 밖으로 흐른 피가 손바닥에 묻어났다. 나는 그 자리에서 굳어 피가 묻은 손바닥을 내려다 보는 일밖에 하지 못했다. 목구멍이 저리도록 따끔거렸다.
저 멀리서부터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고 두리번거리니 날 바라보고 있는 오소마츠를 어렵지 않게 찾았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환하게 웃음지었다. 나는 전과 같이 웃을 수 없었다. 내가 걸어가지 않고 어정쩡하게 서 있기만 하자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오소마츠가 내게로 달려왔다. 오소마츠는 내 앞으로 달려오며 말했다.
"왜 멈춰 서 있고......"
어느새 도착해 느릿하게 속도를 줄이며 말을 하던 그의 입술이 다물어졌다. 걸음 소리를 내던 두 발이 뚝 멈췄다. 부어오른 내 왼뺨에 갔던 눈길이 아래로 내려가 피묻은 입술로 향했다. 차가운 바람이 나와 오소마츠의 사이를 갈라놓듯이 훅 끼쳐 들어와 지나갔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어 입을 열었을 때 또다시 내 입에서 기침 소리가 쏟아졌다.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느라 들고 왔던 우산이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여전히 입을 막은 채로 따끔거리는 감각을 느끼지 않으려고 애쓰며 말했다.
"...미안, 조금 늦었지."
갈라져 볼품없이 끊기는 목소리는 불썽사나웠다. 오소마츠가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전혀 예상이 되지 않았다. 그는 눈에 띄게 떨리는 손을 내쪽으로 뻗더니 조심스럽게 나를 껴안았다. 오소마츠의 두 손이 내 등허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내 예상과는 다르게 그는 내 상태를 어느정도 짐작하고 있던 것 같았다. 내 발자국 소리조차 알고 있는 그가 나에 대해서 모를 리 없을 텐데. 그렇다면 오소마츠가 돌아오기 전에도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다는 것 또한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추운 날씨임에도 그의 품만은 따뜻했다. 내 이마에 길게 입술을 내리누르던 그가 말했다.
"추우니까 안으로 들어갈까?"
목구멍이 심하게 아린 탓에 나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오소마츠는 내가 떨어트린 우산을 주워 주더니, 나를 가볍게 안아 들고 워더링 하이츠로 향했다. 내가 추워서 몸을 떨어대니 그가 나를 바짝 안았다. 오소마츠의 발자국이 길게 이어졌다.
워더링 하이츠에 도착한 나는 오소마츠의 도움을 받아 난롯가 쪽 안락의자에 앉았다. 아픈 게 아니니까 앉는 것 정도는 혼자 할 수 있다고 아무리 만류해도 소용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적막한 워더링 하이츠에 사는 사람이라곤 오소마츠와 하인 둘 뿐이었다. 나는 세월의 흔적이 여실하게 남은 집을 눈으로 둘러보았다. 오소마츠가 손님에게 줄 따뜻한 차를 내오라고 하인에게 지시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잔이 간이 테이블에 올라왔다. 오소마츠가 하인 둘을 전부 저택 밖으로 내보냈다.
그는 안락의자에 앉은 나에게 두꺼운 담요를 덮어주고 내 옆에 앉았다. 나는 따뜻한 잔을 매만지고는 겨우 한 모금 마셨다. 잔의 표면에서 온기가 올라왔다. 오소마츠가 신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오소마츠. 내 말이 끝날 때까지 가만히 있어줄 수 있어? 아무것도 묻지 말고."
"기꺼이."
오소마츠가 의자를 내 쪽으로 더 가까이 끌고 와 앉았다. 그는 팔받이에 팔꿈치를 대고 나를 향해 상체를 내밀었다. 나 또한 회답하며 그에게 몸을 기울였다. 나는 따뜻한 차를 한 모금 정도 더 마신 다음 말을 꺼냈다.
"...잭이 나를 때렸어."
"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던 오소마츠가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상기된 얼굴에서부터 순식간에 치솟아 오른 분노가 느껴졌다. 그를 그냥 두면 바로 드러시 크로스에 찾아갈 것처럼 보였기에 나는 손을 뻗어 그를 겨우 자리에 도로 앉혔다. 자신에게로 뻗어진 손을 잡고 문지르던 오소마츠의 낯빛이 순식간에 분노와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내 손을 쓰다듬으며 안정을 찾는 오소마츠가 너무나 안쓰러워 나는 어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 말해줄 테니까 진정해."
"...하지만 어떻게 진정하지? 결국 미쳐버린 그가 네게 손을 댔는데?"
명백히 떨리는 오소마츠의 손끝이 나의 얼굴에 향했다. 피가 돌아 붉은 기가 도는 손가락으로 내 왼뺨을 한 번 스쳐지났다가 다시 돌아와 감쌌다. 그는 그동안 잠을 제대로 잔 적이 없는 건지 눈이 보기 나쁘게 충혈되어 있었다. 눈 밑 살점은 약간씩 거뭇하게 변색되어 보였다. 피곤에 절여진 안색은 그가 신경질적으로 보이게끔 했다. 내 부은 뺨을 쓰다듬던 그가 고개를 내밀어 가볍게 입맞추고 말했다.
"그런 미친놈에게서 한시라도 빨리 떨어트려 놓는 게 좋겠어. 장미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렇게 하라며 입을 열려던 와중 갑작스럽게 내 목에 석탄가루라도 낀 것 같은 뻑뻑함을 느꼈다. 몸 상태는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숨을 쉬기 버거워지는 감각이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몇 년 동안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지만 이 정도로 고통을 호소하게 될지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숨을 쉴 수 없어 허리를 굽혀 몸을 옹송그리다 왼손으로 뻐근하게 조여오는 가슴팍을 쳐댔다.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울려오는 것 같았다. 겨우 들이킨 숨에선 피 맛이 났다. 내 상태가 변화하자 분노가 어렸던 그의 표정에 순식간에 극심한 염려가 엿보였다.
"괜찮아?! 장미야!"
나는 오소마츠의 부름에도 그 어떠한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오른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잔기침을 해댔다. 건조하게 갈라진 입술 틈새로 적지 않은 양의 검붉은 피가 쏟아졌다. 입을 틀어막은 손바닥이 뜨끈해지는 온도가 느껴졌다. 의자에서 쓰러지듯 일어나 나를 끌어안은 오소마츠는 울먹이는 듯 하다가 화를 내며 바깥으로 내보낸 하인들을 소리쳐 불렀다. 녹슨 경첩이 돌아가는 익숙한 소리가 들리자마자 오소마츠가 소리쳤다. 비참하게 격분한 성음은 오소마츠의 성대를 긁어내려갔다.
"빨리 의사를 불러! 빨리! ...아, 아......"
저택에 발을 들인 하인이 우당탕하는 소리를 내며 다시 급하게 나갔다. 내가 겨우 쉬는 밭은 숨이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안쓰러운 소리를 냈다. 오소마츠가 테이블에서 손수건을 찾다가 찻잔을 깨트렸다. 유리가 산산조각 나는 요란한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깨진 유리조각 하나가 작은 식기에 부딪쳐 긁혔다. 찻잔에 담겨 있었던 찻물이 테이블에 퍼져 나갔다. 오소마츠는 분명 뜨거운 찻물에 손을 데였을 텐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찾은 손수건으로 내 입가를 닦아주었다. 흰 천조각이 붉게 물들어갔다. 오소마츠는 내가 다시 기침할 때마다 어깨를 움츠렸다.
내가 조금 잠잠해지자 그는 피 묻은 손가락으로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을 다루듯이 나를 껴안고 훌쩍거렸다. 여전히 목이 시리도록 따끔거리는 탓에 나는 무슨 말도 할 수 없었다. 말을 하려고 하면 단어조차 채 되지 못한 신음소리만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오소마츠는 내 등을 쓰다듬으며 상체를 맞붙여 안았다.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가 되는 심장 소리가 미약했다. 나의 심장은 맞닿은 상체에서 울려오는 그의 심장 고동을 따라 뛰었다.
나는 그날 워더링 하이츠에서 돌아온 뒤로는 늘 드러시 크로스의 내 방 침대에 누워서만 지내는 생활을 이어갔다. 의사에게는 극심한 스트레스와 그 외의 이유들 때문에 내 몸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망가졌다는 진단을 들었다. 이 땅에서 숨을 쉬며 살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비극에 가까운 말도 포함이었다. 돌이킬 수 없다는 말은 드러시 크로스 저택에서 쓰러져 전에 의사가 방문했을 때 이미 들었던 것이었다. 살 수 있는 날에 대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나 나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잭 애덤스와 같이 지내는 몇 년 동안 나에게 행복한 일이라고는 한 번도 없었으니까 당연한 결말일지도 몰랐다. 다만 의사의 말을 들은 오소마츠의 절망한 낯이 하루종일 눈 앞에 맴돌았다. 그 또한 심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운명을 알고 있었을 텐데. 언젠가 그에게서 들었던 위태로운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그 언어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환청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언제나 내 곁에 있어줘. 네가 어떤 모습이든지 상관없어. 차라리 나를 미치게 해줘! 너를 볼 수 없는 지옥 같은 세상에 날 혼자 내버려두지 마. 난 네가 없이 살 수 없어!
그로부터 이틀이 지나고, 잭은 그 짧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해쓱해진 낯으로 나를 찾아왔다. 노크도 하지 않고 들어온 사람이 내민 것은 이혼 서류였다. 나는 여전히 침대에 누운 채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잭에게서는 마치 지금의 나처럼 얼굴에 핏기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귀신을 만난 사람처럼 공포에 벌벌 떨리는 손으로 내게 펜을 넘겨줄 뿐이었다. 나는 서류에 서명을 하며 잭에게 무어라도 묻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 게다가 내가 서명을 마친 것을 보자마자 잭이 서류를 빼앗고 도망치듯 방을 나서는 바람에 더욱 불가능했다. 나의 추측에 지날 뿐이지만 분명히 오소마츠가 연관되었으리라 생각했다. 내가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처지라는 걸 알고 있는 친절한 변호사가 드러시 크로스에 직접 찾아왔다. 그렇게 잭과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이혼을 마쳤다. 지금까지 질질 끌어댄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나와의 관계가 끊어진 뒤로 잭은 자신의 유일한 재산인 드러시 크로스 조차 오소마츠에게 넘긴 후 필요한 짐만 싸서 도망쳐 떠났다.
지긋지긋한 결혼 생활을 마치고나서 나는 워더링 하이츠로 돌아왔다. 오소마츠는 하루종일 내 곁에 있었다. 내가 워더링 하이츠에 돌아가고 싶다고 하자, 아직 아프니 조금만 쉬었다가 가자고 그가 만류했지만 내가 거절했다. 오소마츠는 내가 더 살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 같았지만 내 수명은 내가 제일 잘 알았다. 여태껏 살아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내 생명은 폭풍 아래 놓인 촛불과 같이 희미했다. 날이 갈수록 기침을 하는 빈도가 늘었으며 체중은 눈에 보이게 빠져 귀신처럼 창백하게 말라갔다. 식사를 하는 날에는 먹은 것을 빈번히 다시 게워냈다. 워더링 하이츠로 돌아갔을 때에는 언젠가 그에게서 들었던 말과 같이 워더링 하이츠 창문의 어느곳을 내다보아도 장미꽃이 피어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것이 기뻐 몇 송이를 가져다 침실의 화병에 꽂아두었다. 그러나 이런 환경에서는 장미꽃이 잘 지낼 수 없어 금방 시들었고 나는 다시 가져다 놓겠다는 오소마츠에게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렸다. 오소마츠는 지극 정성으로 환자인 나를 간호했다. 나는 살 날이 얼마 안 남았음에도 드러시 크로스에서 지낼 때보다 행복했다.
워더링 하이츠에 오고 나서 스무 날 정도가 지났다. 나는 차라리 이대로 죽는 게 더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스트레스가 중첩된 몸은 소리치듯이 괴로워했다. 오늘도 머리에서 기머튼의 성당 종소리가 울리는 것을 느꼈다. 나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 옆에 앉아 있는 이의 손을 겹쳐 잡았다. 그러자 그가 대응하며 마주 잡아주었다. 나는 웃으려고 노력하며 말했지만 분명 우스꽝스러울 터였다.
"오소마츠, 결혼식을 울리는 게 좋지 않겠어?"
"...결혼식?"
오소마츠는 느릿하게 반문했다. 그는 그때의 언덕에서 자신이 주었던 반지를 왼손 약지에 끼고 있는 내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아름다운 보석이 난롯가의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불꽃보다 붉었다. 꼭 심장을 떼다 붙여놓은 것만 같았다. 내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있을 때 오소마츠가 말했다.
"아프니까 조금 더 쉬자."
그는 여전히 현실에서 도망쳤다. 나와 그는 같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내가 처한 상황을 그가 모를리가 없을 터였다. 나는 속눈썹을 아래로 늘어트리고 벽난로 안의 장작들을 보았다. 장작 위로 솟아오르는 매캐한 연기가 벽난로의 굴뚝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나는 말을 꺼내기 위해 마른 입술을 안으로 말았다가 다시 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
내 말에 오소마츠가 곤혹스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장미야."
"나를 이대로 보낼거야?"
내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말하자 실내 공기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신이 거대한 손바닥으로 집안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고개를 숙인 오소마츠가 파리한 내 품에 파고들며 안겼다. 그러는동안 내가 조금이라도 움찔거리면 그도 따라 머뭇거렸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우리 둘의 숨소리만 주변을 메웠다. 타닥거리는 장작 타는 소리가 음악 소리처럼 나와 오소마츠의 존재에 어우러졌다. 나는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손가락을 뻗어 오소마츠를 안았다. 손에 닿는 그의 등은 어렸을 때보다 작아진 것만 같았다.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손끝으로 피아노를 치듯이 그의 등을 두드렸다. 내 품에 들어온 오소마츠의 얼굴에서 슬픈 미소가 번졌다.
그는 천천히 굽힌 상체를 펴고 나를 똑바로 마주했다. 오소마츠가 서서히 내게로 다가와도 나는 피하지 않았다. 곧 서로의 이마가 마주 닿았으며 우린 잠깐의 키스를 나눴다. 입술이 떼어지는 젖은 소리가 지난 후 오소마츠가 말했다.
"식은 언제가 좋을까?"
"최대한 빨리."
그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른 내 손을 한참이나 들여다보고 어루만졌다. 반지 호수를 틀렸을리가 없을 텐데도 오소마츠가 끼워 준 반지는 공간이 남아 헐렁거렸다.
결혼식은 잭과 울릴 때와는 상반될 정도로 조촐하게 준비되었다. 오소마츠는 내가 원하는 거라면 무엇이든지 해도 된다고 하였지만, 내가 소박하게 하길 바랐다. 하객이라고 해봤자 올 사람은 유모 한 분뿐이겠지만 하객도 부르기를 원치 않았다. 유모에게 우리가 결혼할 것이라 미리 언질은 해두었다. 왜 오지 못하게 하는지 의문을 가진 것 같았지만 그저 둘이서만 있고 싶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나를 위해 준비된 것은 화려하지 않은 흰 웨딩드레스와 면사포였다. 결혼식은 기머튼의 성당에 아무도 없을 때를 빌려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누구도 우리의 주례를 진행해주겠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으며 우린 그것을 고맙게 생각했다. 서로의 축복을 바라는 사람은 서로만으로도 충분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어쩌면 다른 사람이 네게 행복을 비는 일조차 질투했을지도 몰랐다. 나는 전과 같이 늘 내 방 침대나 난롯가의 안락의자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이틀 뒤에 진행될 결혼식 준비를 할 때를 제외하고 오소마츠는 늘 내 곁에 있었다. 나는 결혼식 하루 전날에도 오소마츠의 얼굴을 코앞에서 보며 잠들었다.
결혼식 당일이었다. 차갑고 매선 바람이 창문을 거칠게 때렸다. 덜걱거리는 소리에 잠이 깬 나는 침대에 걸터 앉아 옆에 없는 오소마츠를 찾았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세숫물을 든 그가 문을 열고 침실에 발을 들였다. 오소마츠는 단정하고 깔끔하게 웨딩 예복을 차려입은 상태였다. 그의 낯은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도저히 예상이 되지 않았다. 오소마츠는 내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침대와 가까운 테이블에 세숫물을 담은 작은 대야를 올려두었다. 그의 손이 물 안에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찰랑이는 소리 뒤로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리자 나는 눈을 감았다. 그의 손에 적셔진 미지근한 물이 내 얼굴에 닿았다. 그는 한동안 조심스러운 손길을 이어가며 내 얼굴을 씻겨내주었다. 내가 가만히 앉아 있는 동안 그는 자주 말을 걸었으나, 나는 목이 아파 전부 대답하지 못했다. 꼼꼼히 세수를 마친 뒤로는 오소마츠가 침실에서 나가더니 유모가 그를 따라 들어왔다.
웨딩드레스를 든 유모는 내 상태를 보고 무척이나 놀랐다. 그야 다시 워더링 하이츠에서 살기 시작한 뒤로 유모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집안에 틀어박혀 그 어디에도 나가지 않았으며, 그동안 옆에 사람이라곤 오소마츠밖에 없었다. 나의 추측이지만 오소마츠는 내가 다른 그 누구도 만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 같기도 했다. 예전 같았으면 답답할 터였지만 지금은 돌아다닐 힘도 없으니 상관하지 않았다. 당장 신경쓰이는 건 나를 보자마자 일그러진 표정을 짓는 유모였다. 유모는 내게 달려와 나를 껴안았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오소마츠가 놀라 한걸음 다가왔다. 어찌나 세게 안는지 숨을 쉬기 불편해질 정도였지만 안절부절 못하는 오소마츠를 안심시키려고 그를 보며 웃었다. 이어서 울먹거리는 유모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아니, 주인 마님. 괜찮으세요? 어쩌다가 이렇게... 아프신 것은 알고 있었는데..."
"유모, 괜찮아. 곧 결혼식이니까 어서 갈아입어야겠어."
나는 유모를 달래기 위해 웃음기 서린 얼굴로 말했다. 결혼식 전 웨딩드레스도 받을 겸 유모를 한 번 정도 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실수한 것 같았다. 꽤 오랫동안 나를 안고 놓아주지 못하던 유모는 걱정을 풀지 않으며 가져온 웨딩드레스와 구두, 면사포 따위를 내 옆에 놓아주었다. 흰 보석이 박힌 웨딩드레스는 마치 눈이 내려 하얀 언덕에 햇살이 닿아 반짝거리는 모습처럼 보였다.
나를 계속해서 걱정하는 유모에게 괜찮다는 말을 몇 번이나 덧붙였다. 유모는 내 뺨에 길게 키스하고 나서야 겨우 워더링 하우스에서 나갔다. 내가 창문 밖으로 유모가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나니, 다시 오소마츠가 내게 다가와 웨딩드레스를 살펴보며 말했다.
"걱정할 건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래도 만나고 싶었어."
"나는 장미가 정말 으스러지는 줄 알았다니까."
농담하지 말라며 허공에 휘젓는 내 손을 오소마츠가 조심스럽게 잡았다. 잡은 손에 느리게 깍지를 끼고 손끝에 닿는 손등을 약하게 눌렀다. 그의 행동에 나또한 손을 마주 잡았다. 오소마츠는 그렇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나를 바라보다가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그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오소마츠가 입을 열었다.
"드레스 갈아입는 거 도와줄게."
침대 옆에 정갈하게 놓여진 드레스를 그가 집어들었다. 언뜻 보기에도 고운 자태를 뽐내는 웨딩드레스는 그림자 또한 아름다웠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따뜻한 손을 뻗은 오소마츠가 나를 일으켜 세웠다. 뜨거운 열기를 가진 손바닥이 내 허리를 감싸 붙들고 나의 맨발이 바닥을 디디고 섰다. 그는 내 뺨을 훑듯이 쓰다듬고 이마에 입맞췄다. 그 뒤로는 오소마츠의 부드러운 손길에 따라 내가 원래 입고 있던 드레스가 바닥으로 가벼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오소마츠의 도움을 받아 웨딩드레스로 환복하는 과정이 어느정도 끝났다. 깨끗이 닦인 침실의 거울로 내 모습을 보니 드레스가 나에게 꼭 맞지는 않았지만 아까보다는 한결 나아보였다. 안 좋은 점이라면 온통 흰 탓에 내가 정말 귀신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든 것 뿐이었다. 내 상상을 끝내며 오소마츠는 뒤로 돌아선 내 어깻죽지에 입맞추고 등에 있는 리본을 꼼꼼히 묶어 고정시켰다. 그가 나를 천천히 돌아세우며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잘 어울리네."
나는 내게 면사포를 씌워주는 그의 뺨에 짧게 입맞추고 속삭였다.
"고마워."
웃으며 한 쪽 무릎을 꿇은 이는 내 발등에 입맞추고 구두를 신겨주었다. 투명하리만치 빛나는 백색의 구두는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했다.
오소마츠와 나는 침실에서 나오며 결혼 이후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소마츠는 나와 함께 정원을 가꾸고 싶다는 둥 바닷가를 거닐고 싶다는 둥, 짐짓 즐거워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나는 그것이 이루어지기 어렵다고 생각했으나 오소마츠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거들었다.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며 난롯가에 서 있을 때 누군가 워더링 하이츠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오소마츠는 내 손등에 입맞추곤 걸어가 문을 열어주었다. 문 너머에 마차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마부로 추측했다.
오소마츠는 다시 나에게 돌아와 내 손을 잡고 바깥으로 향했다. 밖으로 나가자마자 추운 바람이 매섭게 들이닥쳤다. 새벽 사이에 눈이 내렸는지 언덕은 눈이 시릴만큼 온통 하얀색이었다. 오소마츠는 심려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살피더니 저택으로 다시 들어가 가져온 두꺼운 숄을 내 어깨에 덮어주었다. 난롯가 근처에 두어서 그런지 따뜻하게 더워진 숄이 올라오자 한층 괜찮았다. 마부는 마차에 매어둔 말 위에 익숙하게 올랐다. 오소마츠는 내가 마차에 올라가는 것을 돕고 나서야 올라와 내 옆에 앉았다. 그가 마차의 문을 닫는 것을 신호로 마부가 말을 부리는 소리가 났다. 쌓인 눈을 밟아가며 나아가는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오소마츠는 뼈없는 질문이나 대화를 하며 나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그의 목소리는 초조해보이기도 했다.
우리는 마차를 타고 어느덧 기머튼에 있는 작은 성당에 도착했다. 날이 추워서인지 바깥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오소마츠는 마부에게 데리러 올 필요는 없다고 전했다. 흰 땅 위에 흰 드레스를 입고 서니 마치 세상에 녹아든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 모든 내 추위를 단번에 녹여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추운데 왜 그렇게 서 있어. 어서 들어가자."
나의 오소마츠는 단단한 팔로 내 어깨를 끌어안고 성당 안으로 함께 향했다. 추위 때문인지 내 발과 손이 발갛게 부어 욱신거렸으나 성당 내부로 들어가니 그나마 나아졌다. 오소마츠는 더이상 추위가 들어오지 않게 성당의 문을 확실히 닫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가며 화려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너무 조촐하지도 않게 꾸며놓은 내부를 보았다. 흰색 장미꽃이 가로로 긴 의자의 끝마다 장식되어 있었으며, 성당을 가로지르는 흰색 버진로드가 눈에 들어왔다. 불을 밝혀놓은 촛대는 일렁거리며 주홍을 남겼다. 오소마츠는 내 두 손을 그러잡고 입김을 불어주며 따뜻하게 녹여주었다. 내가 괜찮다며 웃으니 손을 잡고 나와 나란히 섰다. 곁눈질로 본 그의 얼굴은 미소짓고 있었다.
"갈까?"
내가 먼저 발을 뻗으니 오소마츠도 따라 걸었다. 나와 오소마츠는 그렇게 아무런 절차 없이 버진로드에 첫 걸음을 내딛었다. 간결한 결혼식이 진행되면서 어떠한 선서나 각오를 다지는 말도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서로가 제일 잘 알고 있었으니까. 오소마츠는 자신이 예전에 주었던 반지를 빼고 새로운 반지를 내게 끼워주었으며, 나또한 그에게 같은 생김새의 반지를 끼워주었다. 음악도 하객의 소리도 없는 결혼식은 적막했다.
나는 그 적막 속에서 나의 종극을 직감했다. 내가 그토록 바랬던 것이 이뤄지는 것과 동시에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바닥났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머릿속은 온통 어지러웠다. 나의 행복한 시간을 방해하듯 저승에서 손이 뻗어져 나와 오소마츠에게서 나를 또다시 앗아가려 했다. 겨우 뜨인 두 눈으로 보이는 오소마츠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는 누구보다 제일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누구보다 아득했다. 오소마츠의 표정이 초가 흐를수록 실의에 빠졌다. 다음으로 들려온 오소마츠의 말도 뿌옇게만 들렸다. 그는 격렬한 절망에 빠져 나를 끌어안았다. 나의 얼굴을 가린 면사포를 들어내 내 입술에 입맞췄다. 내 몸에 힘이 빠져 그의 품에 쓰러졌을 때 그는 천천히 버진로드의 끝에 주저앉았다. 늘어진 나를 붙잡아 안고 울음을 삼키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귀신이 실재한다고 믿어. 죽어서도 나를 버리지 말고 귀신이 되어서 내 곁에 머물러. 나를 떠나지 마. 차라리 날 미치게 해줘. 널 볼 수 있다면 미쳐버려도 상관없어. 널 볼 수 있다면 나는 무엇이 되어도 좋아!"
그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나는 내 마지막 순간에 그의 곁에 있을 수 있어 행복했지만, 괴로워하는 그를 위로하려 입을 열면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만 비집고 나올 뿐이었다. 그 소리는 점차 입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다가 나를 껴안고 울부짖었다. 그는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내 심장께에 귀를 대고 두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가 점차 꺼져가고 죽음이 문턱까지 다가왔다고 느꼈을 때 나는 마지막으로 그의 흐릿한 음성을 들었다.
"...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