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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속

길라라 - 별솜

+중간에 나오는 아라의 대사는 <접속> 의 패러디입니다.

 

 

벌써 기다린지도 몇 시간이었다. 다시 영국으로 돌아간다던 길럼에게 마지막으로 꼭 만나고 싶다고 말해 이렇게 기다린지도 몇 시간이 넘어갔다. 밖은 까만 밤하늘이 서서히 드리워지고 있었고, 하교하던 학생들도 이제 나타나지 않았고, 늦은 야자를 끝내고 돌아가는 학생들의 모습만이 보일 뿐이었다.

 

선배님. 처음 PC 통신으로 만났던 선배님. 이제 모든 관계들이, 어찌어찌 정리되어서, 이렇게 마지막으로 만나 힘내자고 말해 주고 싶었는데, 오늘, 결국 뵙지 못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아라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기다린 지 세 시간도 훌쩍 넘어 있었다.

 

허탈한 기분으로 추적추적 카페를 나와 공중전화를 발견한 아라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래도 연락이라도 한 통 남겨 볼까. 아니야, 이 시간까지 안 온 거 보면, 분명히 약속 취소인 거겠지. 그렇게 고민을 하던 끝에, 아라는 주머니 속에 있던 동전을 넣고, 천천히 번호를 넣기 시작했다.

 

생각을 담아 번호를 누르는 것에 열중했던 탓일까. 아라는 자신의 옆 의자에 누가 앉아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토록 기다렸던 그 사람. 길럼이 아라의 바로 옆에 앉아 있었다. 그 때, 아라가 전화기를 들고 입을 열었다.

 

“선배님.”

 

아라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동한 항상 또렷하던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듯 했다.

 

“오늘 아침에 지도를 봤어요. 선배님께서 가려고 하는 그곳이 어디인지 한 번 찾아보고 싶어서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하고 싶은 말을 생각해내려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길럼은 얼어붙은 채로, 공중전화 옆에서 계속 가만히, 가만히 앉아 있었다. 저 말의 의도가 궁금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듣는 수밖에 없었다.

 

“선배님께서 가려고 하는 그곳이, 지도에서는 느껴지지가 않았어요. 어떤 곳인지, 선배님이 그리는 그대로일지.”

 

또 다시 정적이 흘렀다. 차가운 겨울 바람 소리와, 침을 꼴깍, 하고 삼키는 아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선배님을 본 적은 없지만... 늘 PC 안에서 글로만 뵈었지만, 저는 선배님이 어떤 분인지 다 알 것 같았는데... 그걸 느끼지 못하고 가시네요.”

 

아라의 목소리가 조금 굳힌 듯 했다. 그러나 길럼은 아라가 괜찮다고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당연했다. 저 굳어진 목소리는 목이 메어서 그런 것이 분명했다.

 

“언젠가 그랬죠. 다시 만날 사람은 꼭 만난다는 걸 믿는다고요. 이제 저, 그 말 믿지 않을래요. 오늘, 단지 선배님을 다시 만나서 이 음악을 함께 듣고 싶었어요.”

 

그렇게 말하며 아라는 고개를 푹 숙였다. 손에 바들바들 들려 있는 무거운 공중전화 수화기가 유난히 무거워 보였다. 한 손에 쥐고 있는,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LP가 가을 낙엽처럼 바들바들 떨렸다.

 

아라가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후, 하고 한숨을 내쉬는 아라의 얼굴에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이 정도면 충분한 거야. 이렇게 말했으니, 그걸로 된 거겠지. 닿았으면 좋겠다고 바랄 수밖에 없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아라는 공중전화 수화기를 나왔다.

 

터덜터덜, 조용히 집으로 걸어가는 아라의 발걸음이 유난히 지쳐 있었다. 발 밑에는 수많은 배우들과 감독들의 손도장이 찍혀 있었다. 이 모습들을 평소 같으면 어, 누구네! 어, 이 사람, 여기 있구나. 라고 생각하며 걸어갔을 건데, 오늘은 힘이 쪽 빠진 듯한 탓에, 아라는 그저 그렇게 추적추적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비조차 내리지 않는 푸른 하늘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라는 마치 빗방울 같았다.

 

영화관 앞을 스쳐 지나가던 아라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길럼과 함께 보기로 했던 영화 포스터가 대문짝만 하게 걸려 있었다. 아, 맞다. 이거 같이 보기로 했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아라의 얼굴에는 약간의 그리운 듯한 얼굴이 걸려 있었다.

 

그렇게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려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아라의 손목을 잡았다. 아라는 그대로 뒤를 돌아보았다.

 

길럼이 한 손에 영화표를 든 채, 아라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둘에게는 그 어떤 설명도, 각주도, 필요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던 둘은, 마침내 서로를 바라보며 환하게 미소지었다. 저 멀리에서 <A lover’s concerto> 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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