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eet Steven Starphase
스팁양 - 까메오양
조 블랙의 사랑 中
다 늙어 노망이 난 걸까. 아니면 코끼리도 자기 죽을 때를 알고 무덤가로 향하듯 이 육체도 떠날 날을 느끼고 있는 걸까. 노인은 가쁘게 뛰는 가슴을 움켜쥐며 남몰래 신음을 삼켰다.
가물가물 흐려지는 시야 사이로 서류가 흐트러진 책상이 보였다. 그중에서도 작은 액자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주식회사 패리쉬'. 젊은 날 부푼 꿈만 안고 자신의 이름을 내건 채 시작한 사업은 평생을 바쳐 지금 모습까지 키워냈다. 하물며 뉴욕이 무너질 때도 회사만큼은 꿋꿋하게 버텨냈는데.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 내세울 것 없는 삶이었으나 단 하나 지키고 싶은 게 있다. 하지만 괜찮을까? 그 아이에게 회사를 맡겨도? 걱정이 결단을 앞서는 그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그래." 목소리가 말했다.
단호하면서도 온화하고, 따듯하면서도 차가웠다. 꿈결 속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흐리멍덩하면서도 피고인에게 판결문을 읽어주는 판사처럼 한치 흔들림 없었다. 그제야 노인은 안도하고 눈을 감았다.
§
비서가 보스를 잘못 만나면 별 잡스러운 일까지 모두 떠맡아야 한다는 사실이야 진즉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한들 모두 회사와 관련된 잡일이라고 생각했지, 설마하니 '잡스러운 일'에 손주 돌보기까지 있는 줄은 몰랐다. 보스의 손주와 손주의 친구와 또 그 친구의 동생까지. 신이 난 세 아이 뒤에 서서 시린 손끝을 겨드랑이 사이에 끼워 넣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 전날이자 주말의 첫날인 토요일, 시간은 저녁 5시. 42번가의 거리는 이름에 'Hell'이 들어가는 도시답지 않게 화기애애하고 웃음이 넘쳤다. '바깥'처럼 인류만 존재하는 이곳은 3년 전, 이 도시가 뉴욕이었을 적의 크리스마스 풍경을 거의 완벽하게 재현했다.
'이 조경을 구성하는데 도대체 얼마의 제로가 쓰였담.'
내 월급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집값을 떠올리며 혀를 찼다. 민주주의의 나라라는 곳에서 ‘격리거주구의 귀족’이라니 아이러니다. 자꾸만 땅 저 밑으로 가라앉는 내 기분과 달리 산뜻하기 그지없는 머라이어 캐리의 풍부한 음색의 노랫소리가 거리를 채웠다.
All I Want for Christmas Is~♪
노랫말이 대답을 기다리듯 길게 늘어졌다. 그래, 나도 크리스마스에 원하는 게 있었다.
원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었더라면 이 소중한 시간에 친구들과 예약해둔 식당에 모여 한참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을 파티를 즐기고 있어야 했다. 크리스마스 이브부터는 연인이라든가 가족 등 소중한 사람들과 오붓한 시간을 보내야 하므로 우정의 도모하는 건 그 하루 전날로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오늘로부터 바로 이틀 전, 약속 장소도, 시간도, 멤버도 하물며 모임 회비까지 모두 완벽하게 준비를 마친 그날. 모든 일이 틀어지게 된다.
비서의 점심시간은 항상 바쁘다. 겨우 짬을 내어 식당에 가기도 힘들뿐더러, 음식을 주문하고 나오기까지 그 잠깐의 시간도 기다리지 못하는 불같은 보스의 부름을 받고 취소도 못 한 채 사무실로 복귀하기 일쑤였다. 이걸 몇 번 반복한 결과 아예 선식 한 박스를 책상 아래 쌓아두게 되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서는 한 손으로 전화를 받으면서도 다른 한 손으로는 바텐더 못지않은 현란한 솜씨로 쉐이크를 만드는데 이르렀다.
선식의 까슬한 식감이 혀끝을 괴롭힐 때면, 비서가 보기보다 고된 일이라며 걱정하던 주변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때는 오히려 호기롭게 비서가 되기로 했을 때부터 각오한 일이니 하나도 두렵지 않다는 허세를 부렸는데. 그날의 나는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속으로 혀를 차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전화기에 깜빡깜빡 불이 들어왔다. 수화기 옆 전등 중에 첫 번째 전등은 보스의 전화라는 신호다. 마시던 선식을 내려놓고 표정도 바꾸었다.
"네, 보스. 필요하신 게 있나요?"
"내 방으로 들어오게."
생글생글 웃으며 전화를 받으니 건너편에서 무뚝뚝하고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고는 뚝 전화가 끊겼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지금이 점심시간이라는 것도 모르나? 그것도 보스의 수많은 인맥이 거는 전화에 하나하나 대답해주느라 가장 바쁜 시간이거늘. 하지만 돈줄 앞에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할 수 있는 담력을 가졌다면 지금쯤 다른 일을 하고 있었을 테다. 어쩌면 도시 괴담 속 비밀결사 '라이브라'의 멤버가 되었을지도 모르지. 무엇보다 아직 보스에게서 배우고 싶은 게 있었다.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방문 앞에 섰다.
"보스, 접니다."
노크는 세 번. 말은 간결하게. 문가에 귀를 대고 기다리면 곧 '들어오게.' 하고 걸걸하지만 단호하고 힘 있는 음성이 들려왔다.
아이보리색으로 이루어진 사무실은 별다른 꾸밈없이 원목 책상과 접객용 테이블만 놓여 있다. 최소한의 필요한 물건만 갖추어 간결하지만 썰렁한 느낌이 없도록 빈틈없이 인테리어 된 사무실은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요즘 세대의 감성을 자극했다. 한때 건축 및 실내 디자인을 취재한다는 잡지사에서 여기저기 카메라를 들이밀고선 이 각도 저 각도로 사진을 찍어간 그 사무실이기도 하다.
통창으로 조성된 한쪽 벽면에서 햇빛이 들어오는 일은 없었지만, 근처에 서면 이 도시의 안개와 어울려 오히려 구름 위에 건물이 있는 듯한 착각을 주었다. 그런 창가 앞에 보스가 서 있었다.
뒷짐을 진 보스는 묵념이라도 하는 양 한참이나 눈을 내리깔고 저 너머만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내가 들어온 걸 잊었나 싶어 헛기침을 해봐도 소용이 없었다. 때마침 밖에서 전화벨 소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도 보스는 요지부동이었다. 따르릉―, 따르릉― 끊임없이 이어지는 벨 소리를 따라 심장 박동도 빨라졌다. 마음은 조급한데 보스는 홀로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처럼 평화로워 보였다.
마침내 벨 소리가 멈췄다. 보스도 그제야 고개를 돌려 나를 마주 보았다.
"미안하지만, 자네에게 부탁이 있어 불렀네."
단순한 말에도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건 보스가 살아온 세월의 무게가 담겨 있기 때문일까. 나는 아까와 다른 의미로 바짝 긴장하여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가 뒷짐 진 팔을 풀고 책상 앞에 섰다.
"나를 대신해서 이번 주말 동안 손주를 봐줄 수 있겠나?"
요컨대, 42번가 밖의 바닷가 근처 유원지에 설치된 아이스링크에 손주를 데려다주기로 약속했으니 나더러 대신 다녀오라는 명령이었다.
§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사시나무 떨듯 달달 떠는 나와 달리 아이들은 통통하게 살이 오른 두 뺨을 오물거리며 바쁘게 떠들어댔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에 추운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부러워라, 건강도 하지. 유년 시절에만 가질 수 있는 남다른 활기에 감탄하고 있으면 바로 그때 친구의 동생이라는 아이가 킁 하고 코를 훌쩍였다. 비염일지도 모르겠지만 괜히 감기 증상이면 큰일이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곧 사춘기에 들어설 정도로 제법 나이를 먹은 아이들인데도 남의 아이라고 큰 빚을 진 것처럼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얘들아, 잠시 와보렴."
"무슨 일이에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속 보스의 자녀처럼 되바라진 아이면 어쩌나 염려했던 것과 달리 동행한 친구들까지 모두 착실했다. 내가 부르면 세 아이 모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부르는 대로 다가왔다. 그중 방금 코를 훌쩍인 가장 어린아이 앞에 무릎을 굽혀 눈을 맞췄다.
"춥지는 않고?"
"하나도 안 추워요!"
이제 와서 집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나오기라도 할까 걱정한 것일까. 케인이 씩씩하게 대답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영락없이 겨울바람에 얼어붙은 모양새기만 했다. 하기야, 친구들과 놀 생각에 들뜬 마음을 이해 못 할 바도 아니다. 당장 나부터 엊그제까지 들떠있지 않았던가. 쓰게 웃으며 케인의 목에 걸린 목도리를 다시 여며주었다. 목에 스치는 바람이 없도록 돌돌 말고서 매듭을 지으려는데 그 순간 검고 커다란 손이 불쑥 나타났다.
뉴욕이었어도 질겁할 상황인데, 하물며 이곳은 헬사렘즈 로트이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일이 일어나고, 상상하지 못한 일도 벌어지는 곳. 비명조차 지르지 못할 정도로 겁을 먹은 몸이 딱딱하게 굳은 게 느껴졌다.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쳐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삐걱거리는 몸을 움직여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사내가 굳은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터틀넥으로 감싸인 목덜미에 붉은색 문신 끄트머리가 보였다.
'마피아다.'
온갖 범죄자가 들끓는 도시에서 마피아 하나 만난 게 뭐 대수냐 만은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포식자를 앞에 두고 기절한 토끼처럼 옴짝달싹 못 하고 말았다.
처음 눈에 들어온 건 왼쪽 뺨을 가로지른 깊은 자상이었다. 칼 같은 날붙이나 짐승의 발톱 같은 날카로운 무언가에 살점이 뜯어나간 모양새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흉터 바로 옆에는 녹슨 구리처럼 불그죽죽한 눈동자가 날카롭게 번뜩였다. 반듯한 외형으로도 감출 수 없는 위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바로 그때, 어둑해진 거리에 하나 둘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지직, 팟! 하는 소리와 함께 가로등에도 빛이 들어왔다. 그 빛을 등진 남자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졌다.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돋았다. 그래도 떨리는 몸이나마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팔을 붙잡힌 채 몸을 틀어 아이들 앞을 막았다.
"얘들아, 어서 도…!"
망가. 내 말은 어쩐지 반가운 듯한 기색으로 미소짓는 두 아이에 의해 잘리고 말았다. 마무리 짓지 못한 매듭을 손에 쥔 채로 케인이 크게 입을 벌렸다.
"어, 아저씨다!"
"아저씨라니?"
설마 이 마피아랑 아는 사이란 말인가. 황망해져서 물어보자 내 팔을 붙잡은 남자 역시 허탈한 어조로 말했다.
"이 사람은 누구니?"
케인이 마크를 바라보았다.
"친구네 할머니를 대신해서 오신 분이요."
"우리 할머니의 비서래요."
마크가 대답하자 보스의 손주인 꼬마 패리쉬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제야 남자도 내 팔을 놓아주었다. 얼마나 우악스럽게 잡고 있던지 피가 통하지 않던 팔이 찌르르 저렸다.
"미안합니다. 마음이 앞서서 제가 실례를 저질렀군요."
남자가 헛기침하며 사과했다. 저린 팔을 주무르면서 나도 되물었다.
"그러는 당신은 누군데요?"
"우리 엄마 친구예요!"
이번에는 케인이 대답했다. 제 대답이 썩 뿌듯한지, 케인은 씩씩한 표정으로 우리를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곤란한 듯 머쓱하게 웃더니 다시금 말했다.
"아이들 어머니 되는 분의 직장 동료입니다."
§
아이들 안에 내재한 가능성은 말 그대로 무한하다.
그저 틀에 박힌 구호와 같던 말이 오늘에서야 진정으로 다가왔다. 조금 전만 해도 처음 타 보는 스케이트가 낯설어 서는 것조차 못하고 벽에만 붙어있던 아이들이 지금은 입을 함지박처럼 벌리고서는 깔깔 웃어 재끼며 비틀비틀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얼떨결에 동행하게 된 남자가 손을 잡고 몇 번 끌어주니 아이들은 금세 요령을 익혔다. 그 사이에 또 스케이트 타는 데에 익숙해졌는지 이제는 자기네들끼리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링크장을 돌기 시작했다. 그런 아이들을 뒤따라 두어 바퀴 더 링크장을 돌고 난 남자가 쓱 미끄러지듯 다가와 내 옆에 섰다.
"괜찮습니까?" 남자가 물었다. 그러고는 흉터가 있는 제 뺨을 문지르며 덧붙였다. "정 힘드시면 아이들은 제가 볼 테니 밖에서 쉬고 있어도 됩니다."
"전 괜찮아요. 그냥… 오랜만에 타니까 어색하네요."
난간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고서 한 발만 쓱쓱 앞뒤로 밀어보았다. 나도 어려서는 스케이트를 참 잘 탔는데.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 스케이트를 타지 않게 되었던가.
잠깐 다른 생각 좀 했다고, 그사이 집중이 흐트러졌나 보다. 몸이 기우뚱 한쪽으로 쏠리는가 싶더니 한쪽 다리가 앞으로 쭉 미끄러졌다. 뒤늦게나마 균형을 잡으려 다른 팔을 흔들어도 아무 소용 없었다. 어어? 하는 사이에 시야가 반전됐다. 하얀 조명이 눈부신 천장이 보이더니 곧 남자의 얼굴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거리에서 만났을 때는 흉터에 정신이 팔려 미처 인식하지 못했는데, 남자의 얼굴은 고전 영화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빼어난 인물을 자랑했다. 짙은 눈썹과 그늘진 눈매는 그윽했고, 쭉 뻗은 매부리코는 그를 정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그리고 꼬리가 휘어 올라간 입술은…. 감상이 더 이어지기 전에 내 허리를 받친 손이 휙 하고 뒤로 젖혀져 있던 몸을 끌어올렸다.
또다시 시야가 바뀌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보다는 맞닿은 몸에 정신이 팔려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품에 안기고도 남는 너른 가슴이라던가, 불쾌하지 않을 만큼 옅게 배인 향수의 잔향, 낮은 한숨 속에 섞인 깊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영 '꽝'이었던 첫인상도 까맣게 잊어버릴 만큼 자극적인 구석이 있어, 긴긴 솔로 생활과 녹록지 않은 사회생활에 얼어붙은 가슴마저 사르르 녹아내리게 했다.
시간이 멈춘 듯한 그 감각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케인의 목소리가 우리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탓이다.
"형, 형. 저기 좀 봐."
"쉿! 이리와, 케인. 두 분을 방해하면 안 돼."
난처함에 물든 마크의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제야 정신이 퍼뜩 들었다. 애들 앞에서 이게 무슨 추태람. 후다닥 몸을 떼어냈다. 흐트러진 옷을 바로 하고 큼큼 헛기침하며 민망한 마음을 숨겼다. 힐끔 곁눈질해 보면 남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은 그런 우리를 보며 서로 키득거리고서는 쌩하니 지나쳤다. 이계인과 인류가 어울려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링크장 속에서 아이들의 뒷모습을 시선으로 좇으며 입을 뗐다.
"그러고 보니 경황이 없어 성함도 여쭙지 못했네요. 아까 들으셨겠지만, 패리쉬 씨의 비서로 일하고 있어요."
가방에서 명함을 꺼냈다. 남자는 명함을 받아 들고서는 적힌 이름을 소리 내 읽었다.
"그쪽은…?"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스티븐입니다."
하는 일은 변변찮아 말씀드리기 부끄럽네요. 남자, 아니. 스티븐이 덧붙이며 웃었다. 대붕괴 이후에도 이 도시에 남은 인류 중에 어디 사연 없는 이가 있던가. 스티븐 역시 그중 하나려니 생각하며 더 캐묻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보다는 '다음에도 만날 수 있냐'라던가, 혹시 '당신도 방금 나와 같은 기분을 느꼈냐' 같은 게 더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알듯 말듯 야릇한 표정으로 명함을 매만지는 모습을 보자니 차마 아무 말 할 수 없었다.
시간은 상대적이다.
거리를 나설 때만 해도 영원할 것처럼 길게만 느껴졌던 하루가 어느새 끝을 맞이하고 있었다. 무거운 스케이트를 끌고 링크장을 도느라 지친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 밖으로 나오니 사위는 칠흑처럼 새까맸다. 자욱한 안개 사이로 흐린 가로등과 깜빡거리는 네온사인만 길을 밝혔다.
이제 아이들을 무사히 집에 돌려보내는 일만 남았다. 꼬마 패리쉬에게는 곧 보스가 보낸 차가 도착할 예정이라, 남은 두 아이는 스티븐이 데려다주기로 했다. 케인의 영상통화 화면에 나타난 아이들의 어머니는 스티븐의 얼굴을 보자마자 꽥 비명을 질렀다.
"뭐야? 네가 왜 우리 애들이랑 있어? 기분 나빠! 죽어!"
스티븐은 그저 눈썹을 늘어뜨린 채 하하 웃기만 했다. 중간중간 '이거 내가 잘못한 일이야?' 되물으며 반박을 시도했지만 '속 시커먼 남자에게서 못된 걸 배울까 겁난다'라는 매도만 돌아올 뿐이었다. '엄마의 친구'라던 케인의 표현이 정확했다.
이별은 담백했다. 꼬마 패리쉬와 함께 보스가 보낸 차에 몸을 싣고 나면, 스티븐은 창문 밖에서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끝이 났다.
… 난 줄 알았다.
운명은 늘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 거대한 흐름 앞에서는 계획은 물론 개인의 의지나 다잡은 마음 따위 달리 어떻게 할 도리 없이 휩쓸리고 말 뿐이다. 이번 만남은 인연이 아니었구나, 스스로를 다독이며 겨우 그날 일을 잊어가던 내 앞에 보스를 대동한 채 싱글벙글 웃는 표정으로 나타난 스티븐처럼 말이다.
며칠 전 일인데도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이 재회를 반가워해야 할지, 아니면 화를 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얼이 빠진 내 모습 따위 아랑곳하지 않은 보스가 스티븐을 향해 손짓했다.
"인사 나누게. 오늘부터 한동안 나와 함께 일하게 됐네."
스티븐은 그 옆에서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아는 척을 하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알 수 없는 속내를 셈하느라 머릿속이 어지러운 와중에 보스가 말을 덧붙였다.
"머무는 동안 자네가 여러모로 이 친구를 도와줬으면 하네."
§
그러니까 결국 이건 모두 예기치 못한 사건, 불가피한 사고에 대한 이야기다. 어떤 역경 속에서도 절대 굴하지 않고 싸우던 라이브라 구성원마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할 그런 사건·사고 말이다.
한 회사의 존속을 두고 노인과 두 청년의 운명이 새로운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을 때, 멀지 않은 병원 입구에서는 병문안을 온 방문객의 접수를 받고 있었다.
2m가 넘는 거구의 신사가 무서운 표정으로 방문 장부에 서명을 남기고 꽃다발을 추슬러 안았다. 접수를 마친 간호사는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쓰게 웃었다. 며칠 전, 중상을 입은 환자가 응급실에 실려 온 이래 매일 같이 찾아온 얼굴이지만 볼 때마다 느끼는 무시무시한 중압감은 쉽게 적응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늘이 드리운 눈가에 감도는 슬픔은 여느 병문안객과 다르지 않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아직도 정신을 찾지 못하고 있는 환자를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나 고된지 그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부디 건강하게 퇴원하길. 남은 일거리로 시선을 돌리며 간호사는 속으로 기도했다. 기도가 조금 다른 모습으로 이루어지리라고는 그도 몰랐으리라.
병실 앞에서 크라우스는 잠시 머뭇거렸다. 스티븐이 이토록 긴 시간 입원해 있는 건 지난 송곳니 사냥꾼 시절을 돌이켜 보아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스티븐의 빈 자리는 컸다. 라이브라의 수장으로써도, 그저 오랜 친구로서도.
크라우스가 문을 여는 순간, 가장 먼저 습하고 찬 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직후 그가 마주한 건 텅 빈 침대와 바깥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휘날리는 커튼, 활짝 열린 창문이었다. 꽃다발도 손에서 떨어트린 크라우스가 헉, 입을 벌렸다. 침입이나 전투의 흔적은 없다. 그렇다면 제 발로 나갔다는 이야기인데….
"스티븐…!"
대관절 이건 또 어떤 고난이란 말인가. 붉은 신사가 성난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사람들은 때때로 운명이 절대적으로 정해진 것이라던가, 자신의 선택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대부분 우연의 연속에 불과하다. 심심함에 몸부림치던 어떤 '존재'의 눈에 스티븐이 든 게 우연이었던 것처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계속해서 선택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며 삶을 살아간다. 엊그제 죽음을 앞둔 노인은 제 비서를 후계자를 선택했고, 지금은 크라우스가 사라진 동료를 찾기로 선택했다. 어떤 존재 역시 이제 곧 스티븐으로서 '선택'을 해야 할 일이 머지않았지만, 아직 헬사렘즈 로트는 안개 속에서 평화를 위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