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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카사마츠 유키오×이나세 아즈사 - 미미

고등학교 시절 죽은 첫사랑에게서 오는 우편물이라니 너무 시시한 괴담 소재 아니야? 하고, 카사마츠 유키오는 생각했다. 그 애 앞으로 온 우편을 주방 테이블 위에 방치해둔 지가 벌써 나흘 째였다. 처음에는 누군가가 악질적인 장난이라도 치는 건가 싶었다. 한데 생각해 보니 아무리 떠올려도 그럴만한 사람이 없다. 아마 저를 빼고 그 애와 가장 가깝게 지냈을 모리야마에게 넌지시 이야기를 꺼내 봐도 그러고 보니 그런 애가 있었지… 하는 정도의 반응이 돌아왔으므로 아마 그 애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는 결론이 나왔다. 보낸 주소지로 찾아가 볼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하필이면 교토라서. 회사에 바쁜 일들이 끊이지 않아 집에도 잘 들어오지 못하는 판국이었으므로 언젠가 시간이 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러기에는 온기조차 없는 휑한 주방에 놓인 작은 택배 상자가 괜히 안쓰러워 보였다.

 

 

 

 

 

共病文庫

 

맹장염에 걸려 이틀을 등교하지 못한다던 후배는 전화 너머로 죽어가는 양 징징대던 것치고는 멀쩡해 보였다. 하긴, 그런 것 가지고 새삼스럽게 뭘. 주장 된 도리로 병문안은 갔지만 병원 복도에 앉아 후배를 기다리다 보면 괜히 미간이 찌푸려지고 말았다. 연습 경기가 잡혀 있었는데 이 녀석 때문에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음료수나 뽑아 오겠다더니 행동이 늦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병원은 화창한 평일 오후인데도 오가는 사람이 많아 멋쩍었다. 소란스러운 복도에 멍하니 기대 앉아 있는데 불현듯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렸더니 바닥에 손바닥 만한 연하늘색 노트 하나가 떨어져 있다. 누군가 지나갔을 자리로 시선을 돌렸지만 이미 아무도 없어 다이어리를 집어 든다. 첫 장을 넘기자 찍어낸 것마냥 반듯한 글씨로 적힌 제목 비슷한 네 글자가 눈에 띈다. 공병문고共病文庫…. 잠시간 뜻을 짐작하다가 페이지를 넘긴다.

 

공병문고라 이름 지은 이 노트에 오늘부터 하루하루 느낀 것들을 적으려고 한다. 가족 이외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인데, 나는 몇 년 안에 죽는다.

 

일순간 그 짧은 문장을 몇 번씩 읽어내렸다. 당연하게도 내용은 여전하다. 그렇다면 누군가 장난이라도 치는 건가? 아니면 정말로? 보통 병원에서는 이런 내용의 노트를 손쉽게 주울 수 있는 건가? 어느 쪽이든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한 이야기에 벙쪄 다음 페이지로 넘기는 것을 망설였다. 그러고 있노라면 앉아 있던 내 위로 그림자가 진다.

 

“저기요.”

 

갑작스레 들리는 목소리에 상대방을 올려다 보면 새하얀 머리카락에 환자복을 입은 여자애가 서 있다. 그러니까, 여자애가. 꼭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또래의 여자애가……. 이 타이밍에 나를 불러세우는 거라면 마땅히 이 노트의 주인이라고 예상할 수 있었지만 벙쪄버리고 마는 건 고질적인 버릇이다. 아까 그 이상한 구절을 읽어내렸을 때보다 배는 더 당황해서 멍청하게 바라보고만 있자니 그 애는 잠자코 손을 내민다.

 

“그거, 제 거예요.”

 

“…… 아, 어….”

 

그 손에 노트를 건네면 그 녀석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이 쥐여진 노트를 한 번 훑어보는 듯싶더니 내게 한참이나 시선을 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명찰의 이름을 확인했던 것 같지. 그러다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감사를 표하는 듯싶더니 지체없이 자리를 뜨고 만다. 링거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가벼워서 그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시선을 두다 뒷목을 쓸었다. 특별히 말을 섞는 여자애는 없는 고로 그 애가 어딘가 낯익은 이유를 도통 알 수 없었는데, 함께 선도부 활동을 하던 한 학년 후배라는 걸 알게 된 건 고작 이튿날의 일이다.

 

체육관에서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는 새하얀 뒷모습을 목격했을 때에는 과장을 좀 보태 기절할 뻔했다. 감독과 짧은 이야기를 나누더니 뒤를 돌아 내게 가볍게 목례를 건넨 그 애는 굳이 내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대신 감독의 지사 하에 모여 선 부원들 앞에서 입을 열었다. 담담한 목소리가 역시나 익숙했다.

 

“이나세 아즈사라고 합니다. 2학년이고… 오늘부로 농구부 매니저를 맡게 되었어요. 잘 부탁드려요.”

 

분명 병원에서와 다를 바가 없었다. 굳이 꼽자면 환자복이 아니라 말끔한 교복을 차려입고 있었다는 점 뿐이었을 테다. 억양이 크지 않은 말투도 감정 하나 담기지 않은 듯한 무표정도 심지어는 말을 잇다 말고 나를 바라보는 시선까지도 일정했다. 그런데도 귀가 멍멍하니 아무것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모리야마 녀석이 미인 매니저라며 들떠서는 떠들어대는 목소리조차 흐릿했으니까. 한 대 쥐어박아 주었어야 했는데 주장이랍시고 앞에 불려가 그 애 곁을 지켰다. 괜스레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므로 짧은 시간 오고가며 살폈던 바로, 아니. 별 뜻이 있어서 살핀 건 아니고. 감독의 지시였다. 기껏 뽑아놓은 매니저가 섬세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놈들 사이에서 도망이라도 갈까 걱정한 건지 그 애를 챙겨주라는 말을 했으니까…. 문제라면 나도 적임자가 아니라는 사실 정도였다.

 

아무튼, 도통 알 수 없는 녀석이었다. 농구에 대해 잘 아느냐는 말에는 잠시간 뜸을 들이더니 대충은요, 하며 애매한 답을 내지를 않나. 경기를 구경할 때에도 내내 시큰둥한 반응이질 않나. 도대체 왜 입부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추측되는 바는 있었으나 아무리 그래도 그런 걸로 귀한 시간을 낭비할 리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맡은 바는 전부 해내려 성실하게 굴고, 말 수는 적고 얌전해도 나름대로 할 말은 하고. 그래서인지 이런 부 활동이 익숙하지 않다고 말한 것치고 폐를 끼치는 일은 없었다.

 

나는 그 또래의 여자애들을 대하는 법은 잘 알지 못하지만 그마저도 코보리나 모리야마와 충분히 잘 교류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 큰 트러블은 생기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물론 안일한 생각이었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

 

“췌장이 망가져서, 얼마 살지 못하고 죽어요.”

 

이나세는 빈 체육관 뒷정리를 하며 실없이 농구공을 통통 튀기다가도 불현듯 그런 말을 뱉어냈다. 꼭 나에게만. 조금의 떨림도 변화도 없이. 약봉지를 들고 물을 마시던 중 마주쳤을 때에는 모리야마나 코보리에게는 비타민이라고 둘러대 두었으니 말실수를 하지 않게 조심해 달라고 하지를 않나. 드물게 지각을 한 날에는 달리 혼을 내지도 않았건만 응급실에 실려갔다는 이야기를 해 주고… 함께 음료수를 사러 갔을 때에는 대뜸 밧줄을 집어들더니 죽는 거라면 날이 좋은 오늘도 나쁘지 않겠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하지만 이번은 또 색다른 투였다. 어떻게 이 애는 담담하게 숨이 멎을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한 적도 있다. 노을 지는 체육관 창문을 등지고 선 바람에 표정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더욱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했지만, 이나세는 늘 내가 대답을 내기 전에 다시 입을 열었다. 몸을 돌려 내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선 이나세가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부른다.

 

“카사마츠 선배. 부탁이 있어요.”

 

그렇게 말을 꺼내던 이나세가 옅은 미소를 지었었나….

 

“제 남은 삶을 즐겁게 만들어 주세요.”

 

그 부탁에 어떤 대답을 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生者必滅

 

카사마츠. 이제 보니 소녀들 앞에서 부끄럼 타는 게 아니라 그냥 눈이 높은 거였잖아. 진작 말하지 그랬냐? 이나세도 물론 귀엽지만 사실 내 타입은 아니거든. 내가 충분히 밀어줄 수도 있……. 방정맞게 떠들어대던 모리야마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내가 집어던진 농구공에 얻어 맞았으니까. 이나세가 입부한 지 두 달 즈음 되던 무렵이었다.

 

그런 말을 입에 올리는 녀석에게는 늘 응징을 가하곤 했지만 사실 그 정도 오해에는 달리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여자애들과 말을 섞는 경우라고는 같은 반에서의 어쩔 수 없는 짤막한 대화들과 키세 녀석에게 무언가를 전해달라며 요청해오는 이들 정도였는데, 이나세의 경우는 확실히 이례적이었다. 일단은 농구부의 매니저와 주장이고, 내가 불편해 하는 걸 알았는지 주변을 알짱거리기만 하던 이나세도 그날 이후로는 선배 선배 하며 더 자주 말을 붙이기 시작했으니까. 그냥 말을 붙이는 것도 아니고, 생뚱맞던 그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는 양 방과 후에 마구 불러내기까지 했으니까.

 

언젠가는 함께 돼지 췌장탕을 먹으러 간 적이 있다. 그런 음식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살아있는 생물의 장기를 먹으면 그 곳이 낫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노라고 답지 않게 미신 따위를 입에 올리는 모습을 외면하기 어려웠다. 주문한 췌장탕을 빤히 바라보다 도로 내게 시선을 두고 선배의 췌장을 먹고 싶네요, 하며 말했던 건 아무래도 나름의 농담이었겠지 싶다. 차마 웃어 주지는 못했지만.

 

“토요일에 시간 괜찮으세요? 보고 싶은 영화가 있어요.”

 

그런 생각을 하며 정리를 대충 끝마칠 즈음 아니나 다를까 이나세가 먼저 말을 붙였다.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 거냐고 물었어야 했나. 하지만 아마 다시 그때로 돌아간대도 그러지 못했을 테다.

 

“싫으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알고 계시잖아요. 다 죽어가는 애의 부탁인데.”

 

사근사근 자그마한 목소리로 폭탄같은 말들을 잘도 던졌으니까, 이나세 아즈사는. 그런 말을 듣고 누가 싫다는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겠냐고.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으나 입 밖으로 낼 수가 없다.

 

결국 토요일 열한 시 버스 정류장 앞에서 만나 나란히 영화를 봤다. 요란한 포스터의 코미디 장르 가족 영화였는데, 물론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집중이 되었을 리가 없다. 생각해보면 이나세도 딱히 웃지는 않았던 것 같다. 후배에게 얻어먹을 수는 없으니까 점심은 내가 샀고, 반나절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조차 알 수 없으니 종일 열 마디는 했나 모를 노릇이었다. 이른 오전부터 만나 영화관에 이어 점심 식사까지 함께 하고 있자니 꼭, 뭔가. 미묘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뿐이다. 봄바람이 불어 쓸데없는 생각이 늘었다고 치부했다. 슬슬 헤어지는 거냐고 물으려던 차에 이나세가 내 눈 앞에 휴대폰 화면을 들이민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시내의 카페였다. 가 주실 거죠? 그렇게 묻는 이나세는 거절이라고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뜻밖에 뻔뻔한 구석이 있었다. 옷소매를 잡아끄는 모습에 못 이기는 척 걸음을 옮겼다. 물론 정말로 이기지 못하는 것도 맞지만.

 

생경한 카페 모습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점원부터 직원까지 온통 여자들 뿐이었다. 그래도 연인 정도라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그게 더 문제일지도 몰랐다. 괜히 그런 오해라도 받았다가는…. 화려하게 꾸민 채 삼삼오오 모여 있는 여자애들의 시선이 노골적이라 괜히 눈을 내리 깔았는데, 그 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날 잡아끌어 창가 테이블 한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다면 새삼스레 한 마디 질문을 던진다. 이나세 아즈사가 체육관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삼키고 있던 의문을 내비칠 용기가 생기는 거다.

 

“혹시 감시라도 하는 거냐?”

 

화창한 창 밖 풍경에 시선을 두던 이나세가 그제야 내 쪽으로 도로 시선을 둔다. 느릿하게 꿈뻑이는 두 눈동자 만으로도 내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정도는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그런 그 녀석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도 말이다. 잠시간 어색한 침묵이 일고 역시나 내가 입을 떼기 전에 그 애가 다시 말한다.

 

“제가 선배를요?”

 

의아한 투로 덧붙이는 것에는 덩달아 눈이 조금 커진다. 꼭 내가 그 정도로 한가해 보이기라도 하냐는 양 되묻고 있는 표정이라서. 아니면 됐다, 하고 한 마디를 덧대자 이나세는 짧은 침묵 끝에 아무렇지 않은 대답을 냈다.

 

“떠벌리고 다니실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정말 모르겠다는 양 되물은 것치고 질문의 요지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던 건지. 다른 부원 녀석들 같았으면 핀잔이라도 주었을 테지만 그러지 못했다. 때마침 직원이 우리 테이블로 다가와 형형색색 먹음직스러운 파르페니 커피와 스무디 따위를 건네면 이나세는 잠시 그것들에 시선을 빼앗긴 것 같았다. 맛있게 드세요, 하는 인사를 남긴 직원이 물러나자 어디 한 번 말이라도 이어 보라는 건지 내게 시선을 두었다. 그런 기회를 사양할 만큼 상냥한 사람은 되지 못했다.

 

“그럼 시간을 조금 더 생산적인 일에 쓰지 그래. 나 같은 놈이랑 이런 곳에 오는 거 말고.”

 

“얼마 남지도 않은 시간 아껴 쓰라는 건가요?”

 

뜸 없이 되받아치는 이나세의 모습에 명백한 말실수를 깨닫고 만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기분을 상하게 할 의도도 없었고 그 애를 동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야 아무런 사이도 아닌 주제에 어떤 말들을 건네는 건 때로는 꼴값잖게 보이리라 생각했으니까. 더군다나 죽음을 목전에 둔 본인조차 담담한 태도를 보이는데 감히 무슨 말을 꺼낼 수 있을까 싶기도 했다. 사과를 건네려 할 때 이나세가 내 말을 끊어냈다. 확실히 저는 스무 살까지나 살면 운이 좋은 거겠지만요, 그 정도로 운을 뗀 이나세가 조곤조곤한 투로 말을 잇는다.

 

“… 시간은 공평해요. 어쩌면 선배가 오늘 집에 돌아가는 길에 차에 치이기라도 할 지 누가 알겠어요.”

 

반박할 말도 그러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아 짧게 수긍했다. 여느 때처럼 내 두 눈을 빤히 바라보던 이나세는 드물게도 눈을 내리깔고 반짝이는 찻잔으로 시선을 돌린다. 내 쪽을 바라보지 않고 나지막이 한 마디를 뱉었다. 그리고, 저 지금 꽤 즐거워요. 요컨대 이나세는 시간 낭비는 아니라는 말을 그런 식으로 했다. 뒷목을 쓸어내며, 다행이라고. 꼴사납지 않은 정도의 대답을 냈다.

 

 

 

回光反照

 

인터하이가 삼 주 정도 남은 여름이었나? 이나세는 뜬금없이 그런 말을 꺼냈다. 교토에 가고 싶어요. 태어난 곳이거든요. 하고. 특별한 억양은 찾아볼 수 없어 교토 출신인 줄은 몰랐다. 생각해 보면 잘 어울리긴 한다 싶었다. 빙빙 돌려 말하는 점이라던지 말 수가 적은 부분이라던가… 생각하고 보니 편견에 들어찬 것 같기도 해서 굳이 말로 뱉지는 않았다. 이런 초여름에도 카나가와보다 훨씬 더웠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교토에서는 그 뜨거운 햇볕이 싫지 않았어요. 음, 가지 못한 지는 꽤 오래 됐죠. 아마 죽으면 가게 될 거예요. 가족묘가 교토에 있거든요. 역시 고향에 묻혀야 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사실 딱히 오래 살지도 않았고. 요즘은 카나가와 바다에 흩뿌려지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므로 담담한 무표정으로 죽음을 말하는 이 애의 화법은 도통 적응할 수 없었다. 핀잔을 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못 들은 체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서.

 

“그럼 가자, 교토.”

 

… 하고, 말하고 마는 거다. 충동적으로 내뱉은 한 마디에 이나세는 드물게도 놀란 토끼 눈을 떴다.

 

두 명 분의 기차를 예매하고 배낭에 많지 않은 짐을 챙겨 들고 결국 역에 나서기까지의 과정은 자세히 떠오르지 않는다.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인터하이를 앞두고 여행은 무슨 여행이냐며 핀잔을 주는 감독님의 문자 메시지와 어떻게 눈치챈 건지 즐거운 여행 보내라며 으스대던 모리야마 녀석, 기차 차창 사이로 밝게 내리쬐던 여름의 뙤악볕, 아침부터 준비했다던 도시락을 멋쩍게 꺼내놓는 이나세의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졌던 일, 옆구리가 터졌지만 꽤 먹어줄 만 했던 김밥들이나 어느 순간 까무룩 잠든 그 애의 코 아래에 손을 가져다댔던 일들 따위다.

 

교토는 그 애 말마따나 더웠다. 낮은 산의 중턱 즈음에 위치한 오래된 신사에 도착한 이나세는 옅은 미소를 띄었다. 어릴 적 부모님과 같이 왔던 곳이라고 덧붙인 그 애는 유카타를 챙겨올 걸 그랬나요, 하며 주변을 향해 시선을 둔다. 그렇게 말하는 투에서는 정말로 조금 아쉬움을 찾아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짙푸른 녹음이 향연하는 모습에 덩달아 조금은 들떴던 건지, 값싼 오마모리를 두 개 사서 이나세에게 하나를 건넸다. 별 다른 말 없이 받아들고 신사 앞에 선 이나세는 미동도 없이 석상 따위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보통 이런 곳에서는 소원을 빌지 않냐, 눈싸움이나 하는 게 아니고. 괜스레 말을 붙이자 그런 미신을 믿으실 줄은 몰랐다며 대수롭지 않게 되받아친다. 그런 종류의 말들이 이나세 나름의 농담이라는 걸 깨달은 지는 꽤 되었으므로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도 빌어 봐, 혹시 모르는 거잖냐.”

 

“소원이라고 해도, 딱히…”

 

이나세는 나를 바라보며 내키지 않다는 양 입을 삐죽대다가도 도로 고개를 돌려 신사를 바라본다.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는 걸 보고서야 나도 손을 모으고 섰다. 소원, 소원이라. 막연히 빌어 보라고 말을 꺼내긴 했지만 그런 게 없는 건 이 쪽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믿지도 않으니까. 그렇다면 무슨 소원을 빌어도 상관 없겠지.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먼저 입을 연 건 그 애 쪽이다.

 

“불쌍한 후배의 병이 낫게 해 달라고 빌었어요?”

 

“글쎄다. 넌?”

 

그런 대답을 하면 힐긋 흘겨 보고 만다. 이런 식으로 얼버무리고 마는 건 사실 네게 배운 것이었다고 말해줄 걸 그랬나. 아니나 다를까 그 애 또한 대답하는 대신 그럼 저도 비밀이라며 어깨를 으쓱인다. 교토에 간 그날은 이나세가 유독 건강해 보이는 바람에, 어쩌면 안일한 생각을 했던지도 모른다. 신이 진짜로 있나? 조금은 나아진 게 아닐까? 뭐, 그런 실없는 생각들을. 지고 있는 석양도 수면에 닿으면 아름답게 빛나기 마련이었다.

 

 

 

散華

 

그러니 재앙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닫고 만 거다. 이나세의 휴대전화로 온 의사의 전화를 받고 다급히 달려갔지만 그 애는 여전했다. 처음 그 애 존재를 인식한 날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깔끔한 1인실 병실을 차지하고 앉은 이나세는 새하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채 한 치의 감정도 찾아볼 수 없을 것만 같은 무표정한 태도를 지닌 여자애. 구김 하나 없는 환자복을 입고, 가볍게 떨리는 링거를 팔에 꽂은 채로 병원 냄새를 감추지 못하고….

 

“사실은, 살고 싶었어요.”

 

여전히 죽음을 두려워 했다.

 

갑자기 나빠진 병세는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멍청한 건 내 쪽임이 그제야 확실해 졌다. 죽음이 두렵지 않을 리 없지.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거겠지… 정말 미련 따위를 가지지 않았다면 저를 귀찮게 했던 그 모든 이해할 수 없는 짓들도 하지 않았을 거라고, 이제야 확신이 든다. 분명 환자복을 입은 그 애 모습은 썩 생경하지는 않았지만 병상에 늘어지듯 기대 앉은 것과는 달랐다.

 

죽는다면 차라리 달리는 차에 치여서, 아니면 어떤 제정신 아닌 살인마에게 잘못 걸려서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어요. 그렇다면 저녁 뉴스에 한 줄이라도 신문 기사의 부고 란 한 편이라도 차지할 수 있었겠죠. 무엇보다도, 병원은 정말 지긋지긋해요… 쏟아내듯 뱉어내는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린다. 그러다 아차 싶은 듯 나를 도로 올려다 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피한다. 이나세는 한참의 침묵 끝에 다시금 입을 열었다.

 

“누군가 날 먹으면 나는 그 사람 속에서 영원히 살게 된대요.”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리다시피 말하는 목소리가 나지막하다 못해 들릴 듯 말 듯하다. 또다시 무어라 말하려다 말고 다시 입을 다물어 말 끝을 흐린다. 도로 되물으면 그 애는 나를 빤히 바라보기만 하다 이내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내젓는다. 듣고 싶은 말이나 남이 하려 했던 말 따위를 맞히는 재주는 없었다. 그러므로 긴 뜸을 들였던 것 같다. 시시한 말은 사절이었다. 그러니까, 뭐라고 말해주었더라. 네가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널 동정한 적은 없어, 사실 그 날 신사에서는 네 병이 나았으면 좋겠다고 빌었던 게 맞아, 그것도 아니라면…….

 

 

 

 

 

택배에 적혀 있던 교토의 주소지가 어쩐지 낯익다 싶었는데 고등학교 시절 이나세와 함께 갔던 신사였다. 십 년이면 강산이 바뀐다지만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들은 존재한다는 건지 오래되고 조용한 숲 속 신사는 그 날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다면 달라진 건 역시 나 뿐이군. 아마 그 애는 여전할 테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헛웃음이 났다. 주머니에 대충 집어넣고 나왔던 노트를, 공병문고共病文庫를 꺼내 들었다. 다만 여전히 용기는 나지 않는다. 한 손에 들어오는 작은 노트를 만지작거리다 도로 집어넣으면 그제야 떠오른다. 이나세가 차마 내게 하지 못한 말, 그리고 망설이는 그 애 대신 뱉었던 이야기가. 망연자실해서는 처음 보는 표정을 한 그 애 앞에 눈을 맞추고 앉아 말했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하고. 바야흐로 지루한 첫사랑의 종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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