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파벨 표도로비치 스메르쟈코프×밀로리카 안드레예브나 소볼레바 - Esoruen
지인에게 얻어온 혈액팩을 냉장고에 채워 넣은 밀로리카는, 문득 제 남편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뱀파이어는 늙지 않고 장생한다. 덕분에 인간 사회에 섞여들어 살아가게 되면 많은 불편을 겪게 되기 마련이었다. 빨리 노화하는 데다가 단명까지 하는 그들이 늙지 않는 자신을 수상하게 보기 전에 떠나야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수많은 이름과 신분을 가지게 된다.
그가 남편인 스메르쟈코프와 만나게 된 건, 19세기의 러시아에서 ‘밀로리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던 무렵이었다.
본명을 잊은 채 한 세기가 지날 때마다 이름과 국적을 바꾸며 생활하던 그가 자신의 이름을 밀로리카로 고정하게 된 것도, 그 이름으로 살아갈 때 남편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그에게 스메르쟈코프는 큰 의미를 가진,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스메르쟈코프는 어느 집의 하인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주인집의 어르신이 낳은 사생아였지만, 정식으로 자식이라 인정받지는 못했지. 그렇기에 다들 그냥 하인 취급하였고, 자신도 그리 말할 뿐이었던 거지만, 이제는 다 어찌 되든 좋은 이야기였다.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였으니까.
‘당신은 인간이 아니군요.’
처음에는 그냥 숨죽이고 조용히 살다가 떠날 생각이었다. 이전에 살던 프랑스에서는 원치 않게 소란에 휩쓸리는 일이 많았지만, 이번엔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살아보려고 했지. 그래서 일부러 멀리 떨어진 러시아의 시골 동네까지 온 거였다.
그런데 스메르쟈코프는 그런 자신을 눈여겨보고, 금방 정체를 간파해 버렸다. 살면서 뱀파이어를 한 번도 본 적 없으면서 어떻게 알아본 건지 모르겠으나, 그는 밀로리카가 누구인지 단번에 눈치채고 친근하게 다가왔다.
‘제가 무섭지 않나요?’
‘왜 제가 당신을 무서워해야 합니까? 인간이 아니라서?’
‘인간들은 자신들과 다른 것들을 두려워하잖아요.’
밀로리카의 말을 들은 스메르쟈코프는 느리게 두 눈을 끔뻑이더니, 이내 씩 웃었다.
‘그건 어리석은 인간들이나 그렇지요.’
자신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다는 의미인가. 아니면 자신은 일반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뜻인가. 밀로리카는 아직도 그가 한 말의 본질을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제 삶에 아주 깊숙하게 관여하게 되겠구나. 이번 삶도 조용히 살기는 글렀구나, 라고.
“다 내가 자초한 일이었지만.”
냉장고 정리를 마친 밀로리카는 소파에 앉아 등을 기대었다.
스메르쟈코프는 계속해서 제게 다가왔다. 평소에는 일하느라 바빴지만, 쉬는 시간이 생기거나 늦은 밤이 되어 자유로워졌을 때엔 꼭 얼굴을 비추고 궁금한 걸 물어왔다.
당신의 정체가 정확히 무엇인지, 뱀파이어는 어떻게 사는지, 당신은 어디서 왔으며 언제 뱀파이어가 되었는지.
밀로리카에 대해 끝없이 궁금해하던 그는, 어느날 달콤한 부탁을 해왔다.
‘나를 뱀파이어로 만들어 주십시오. 내 목을 물고, 피를 마시십시오.’
그건 일종의 고백이었다. 뱀파이어가 되어 그대의 곁에 있겠다는, 낭만적인 고백.
하지만 타인을 그다지 믿지 않는 밀로리카는, 혹 제가 오해하는 건 아닐까 싶어 그에게 자세히 물었다.
‘뱀파이어가 되는 건 좋지만은 않습니다. 계속해서 피를 구해 마셔야 하고, 가짜 신분도 잔뜩 준비해야 하죠. 낮에 돌아다닐 수도 없고,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어 영겁의 시간을 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정도는 아무렇지 않습니다.’
‘뱀파이어 세계에서 배울 것도 많을 텐데.’
‘저는 머리가 좋아 금방 배웁니다.’
빙빙 돌려서 묻던 밀로리카는 이대로라면 대화가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직감했다.
단도직입적 화법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답이 나오지 않는 대화가 더 싫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밀로리카는 명확하게 물었다.
‘뱀파이어가 되고 싶은 이유가 뭡니까?’
제 나름대로 비장하게 물은 건데, 스메르쟈코프는 계속해서 장난스럽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물어볼 줄 알았다는 듯이, 그 질문을 바랬다는 듯이, 이 대화가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그거야 물론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서죠.’
밀로리카는 그 고백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도, 스메르쟈코프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신화시대의 끝자락부터 살아온 밀로리카는 수많은 인간과 부딪히며 살아왔다. 개중에서는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끔찍한 인간도 있었지만, 한 번 쯤 다시 만나고 싶은 좋은 인간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 스쳐 지나가는 존재 중 하나뿐이었을 뿐. 밀로리카의 삶에 스며들지는 못했다. 어느 정도 영향은 줄 수는 있었지만, 세월에 굳어버린 마음을 흔들 만큼 강렬한 이는 없었지.
그러나 스메르쟈코프는 달랐다. 그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밀로리카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삶에 파고들어 딱딱해진 마음을 녹였다. 보편적인 인간들과는 다른 가치관,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심으로 알아가려는 적극성. 그리고 얼핏 장난스럽고 가벼워 보이지만 사실은 깊고 어두운 내면까지.
그는 인간이지만 뱀파이어와 닮아있다. 스메르쟈코프는 인간으로 죽기에는 아까운 생물이다. 제가 물어주지 않는다면 그건 서로에게 비극이 되리라.
그리 확신한 밀로리카는 기꺼이 목을 물었고, 자연스럽게 그와 함께하게 되었다. 하지만 결혼하였다고 해서 계속 함께 지낸 건 아니었기에, 지금 밀로리카는 혼자 지내며 여유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피곤한걸.”
소파에 늘어진 밀로리카는 제게 몰려오는 졸음을 막지 않았다. 몇십 년 만에 자신을 만나러 오는 남편은, 지금 밤 비행기를 타고 이곳으로 오고 있으리라.
스메르쟈코프는 요리하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 약 백 년 전쯤, 대뜸 요즘 요리를 배워보고 싶다며 홀로 미국으로 떠났다. 어차피 긴 세월 동안 볼 것이니 상대가 하고 싶은 걸 하게 해주고 싶었던 밀로리카는 큰 고민 없이 상대를 보내줬고, 이후 모로코에 머물며 혼자서 자유로운 인생을 보냈다.
‘공부는 할 만큼 했습니다. 이제는 아내 곁으로 돌아가야겠지요.’
그러나 며칠 전, 스메르쟈코프는 돌연 이런 메일을 보내왔다. 돌아가도 괜찮은지, 언제 돌아가는 게 좋겠느냐는 등의 물음은 없었다. 그야말로 일방적 통보. 하지만 밀로리카는 그 메일이 기분 나쁘지 않았다. 자신도 마침, 남편이 보고 싶었던 참이니까.
“밀로리카.”
졸고 있던 밀로리카가 눈을 뜨자, 예정보다 일찍 도착한 스메르쟈코프가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몽롱한 정신으로 가만히 제 남편을 바라보던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자신과 처음 만날 그날 그대로의 모습이다. 더 늙지도, 젊어지지도 않은. 추억 속 모습 그대로다.
제가 사랑하는 얼굴을 찬찬히 뜯어본 밀로리카는 코앞으로 다가온 입술에 입 맞췄다.
“어서 오세요, 파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