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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영

하인위레 - 사유

EXT. 도시(낮)

거리의 모든 사람이 직장인처럼 차려입었다. 헤어스타일은 비교적 다르지만 비슷비슷하다. 같은 가방을 들고 같은 신발을 신었다. 제각각 이름표를 매달고 있고, 분류된 몇몇 직업이 적혀있다. 바쁜 거리를 지나는 사이 행인의 대화.

 

행인(남) : 이번 달 꿈은 뭔가 난해해.

행인(여) : 오히려 이해하기 쉽던데?

행인(남) : 이전에 보여주던 것보다... <위스퍼레인> 연작이라는데, 이전의 <위스퍼레인>들과는 뭔가 달라.

행인(여) : 색이 그대로잖아. 저번 꿈과 이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행인(남) : 뭐, 그냥 그렇다고.

 

모든 건물에서 알림 소리가 난다. 행인들은 일사불란하게 건물로 들어간다. 인파 사이를 같이 걷는 키샤와 리가 카메라에 들어온다. 나란히 걸으며 대화.

 

리 : 키샤, 일하러 가자.

키샤 : (불만스러운) 봐, 역시 꿈이 이상해.

리 : 내용이 말야?

키샤 : 아니, 꿈이라는 것의 존재 자체가.

리 : 문화부가 과거의 유물을 발굴해 국민들에게 보급해주는 거잖아. 우리가 모두 알아야 할 과거의 기록이라고 말야. 달마다 투명하게 공개...

키샤 : 리, 나보고 조용히 하라는 거야?

리 : 아니아니, 일단 여긴 길거리기도 하고, 나도 재밌게 보니까. 그거 말고는 취미가 너랑 운동하는 것밖에 없어.

키샤 : 똑똑히 들어봐.

 

인서트- 무작위한 패턴이 연속되는 영상. 이야기는 환상적이다. 무작위의 인물이 보내는 하루의 모습이 보인다. 메시지도 자막도 없다. 3일 정도가 지나면, 지금껏 보인 풍경과 비슷한 모양이나 움직임의 변주가 이어지다가, 이내 패턴뿐인 것이 된다(관객들이 이질적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EXT. 사무실(오후)

키샤와 리는 서로 옆 테이블에 앉는다. 질서정연할 정도로 빽빽하게 놓인 책상. 이름표만이 색을 달리한다. 키샤와 리,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게 수군거린다. 때로 쪽지를 써서 넘긴다.

 

키샤 : 최근의 꿈들이 눈에 띄게 이상해졌다고 눈치채는 사람들이 있어. 우리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냐.

리 : 그야 나처럼 꿈 얘기가 취미인 사람이 많아서 그렇지.

 

EXT. 뒷골목(오후)

리 : 키샤. (걱정하는 모습)

키샤 : 이상하잖아. 그런 생각 한 적 없어? 과거의 유물이라 해도 우리가 빽빽하게 갇힌 상영실에 불려가서 그걸 본다는 게...

남자 : 여러분은 우매한 관객이 아닙니다. 우매하도록 만들어진 관객이죠.

 

그 순간, 남자의 목소리가 화면 밖에서 들려온다. 키샤는 뒤돌아본다. 그러면 아무도 없다.

 

리 : 키샤, 왜 그래?

키샤 : 너 방금 사람 목소리 못 들었어?

리 : 안내 방송은 없었어.

 

(중략)

 

INT. 문화부 회의실(과거)

 

장관: 이곳에 모인 여러분은 과거의 문명을 기억할 마지막 사람들입니다. 비디오의 발전에 대하여 아시나요? 비디오가 가정에 들어온 순간 영화의 목적은 변했습니다.

 

10명 남짓 되는 사람들이 앉아 있다. 중간에 번듯한 양복을 입은 장관이 연설한다.

 

장관: 그리하여 저는 비디오를 없애고 모두에게 공정한 꿈을 제공하기로 했죠. 버나드가 제안한 이것이 우리를 공고히 해줄 것입니다. 여러분의 시네마에 경의를, 건배를!

(자막) xxx년, 비밀리에 진행된 문화부 영상사업 창설 축사.

 

INT. 문화부 지하 시설(현재)

키샤와 리는 들어온 입구를 닫고, 주변을 살핀다. 복도 맨 끝에는 빛나는 통로가 있다. 서로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끄덕이고 조심스레 그곳을 향해 걸어간다. 복도의 끝에는 ‘추출실’이라 적혀있다. 경비가 울리지 않는 걸 확인하면 박차고 들어간다.

 

INT. 꿈 추출실(현재)

이름 모를 시설. 거대한 관이 잔뜩 놓여있지만 작동하는 것은 하나뿐이다. 스크린에 푸른 빛이 점멸한다. 한 사람이 놓여있다. 푸른 머리카락을 흘린 채 누운 여자. 그 옆에 하얀 머리의 남자가 서 있다. 남자는 키샤와 리를 바라본다. 남자를 노려다보는 키샤. 은빛 이름표에는 Heinz라 적혀 있다. 소속은 문화부.

 

하인즈 : 드디어 만났네요.

키샤 : (리에게 눈짓한다)

리 : (끄덕인다)

하인즈 : 먼저 호기심 많은 여러분이 견학 오신 겸 안내를 해드릴게요. 주의사항은 아무것도 만지지 말 것. 허튼짓 하시면 경보를 울리겠습니다.

키샤 : 경비를 다 해제해둔 건 당신인가?

하인즈 : 네.

키샤 : 여긴 뭐 하는 곳이길래 문화부의 지하에 있지?

하인즈 : 꿈 추출실이라고 적혀있지 않던가요? 너무 낡아서 글자가 떼어져 나갔나. 여러분이 꿈에 의문을 가진다는 건 이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 꿈을 만드는 곳입니다.

리 : 그보다, 그 여자를 꺼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치료 시설로 보이진 않는데요.

하인즈 : 아, 이것부터 설명해야 하나... 이 사람의 이름은 위스퍼레인입니다.

 

그녀는 여기서 삶을 연명하듯 여러 장치와 연결되어 있다.

 

INT. 꿈 추출실(과거)

이름 모를 시설. 사람들이 거대한 관에 들어있다. 노인 버나드와 하인즈는 대치 상황처럼 서로를 바라본다.

 

버나드 : (기계에 손을 올리며 바라본다. 자연스럽게 움직여 다시 앞을 본다) 이전 문명 때는 하층민들이 이곳에 와 꿈을 팔았지.

하인즈 : '꿈'을 판다고요? 그 기록을 말입니까?

버나드 : 아니. 말 그대로 꿈을. 자네는 모르겠지만 인간은 원래 꿈을 꾸네. 그것은 남이 보여주는 것이 아니야. 자신만의 상영관에서 틀어지는, 나 자신이 주인인 세계. 나 자신이 연출하고 넘나드는 세계라네.

하인즈 : (고뇌한다) 제 상영관이라.

버나드 : 양질의 분량과 연출을 충족하지 못한 꿈은 상용화될 수 없어 다시 잠들어야만 했어. 옛날의 '꿈'은 '연출'이라는 틀을 쓸 수 있었는데, 꿈은 자유로워 우리가 가공할 수 없었다. 개입할 수 없었다. 그리고 연출된 세상에서 자라고 살아가는 너희들은, 불가피하게도, 꿈과 같은 무질서한 매체를 즐길 수밖에 없다고... 그가 말했지. 이 연출은 가히 성공적이었고.

하인즈 : (눈살을 찌푸린다) '연출'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어요. 그렇다면 그건 감옥 같은 겁니까?

버나드 : 하하하! 역시 그 정도 생각밖에 못 하는군. 어쩔 수 없어. 겪어보지 않은 것을 어떻게 아나.

 

INT. 꿈 추출실(현재)

하인즈 : 어찌 보면 과거의 유물을 발굴해 국민들에게 보여준다는 영... 아니, 꿈 사업은 맞는 말이죠. 이 정부가 세워지기 이전을 살던 사람들이 꿈을 생산해주었으니까요.

키샤 : (하인즈를 관찰한다. 소리) 이게 무슨 소리야? 사람에게서 꿈이 나온다고? 추출이라는 말을 보면... 이 자식 대체 무슨 소릴 지껄이는 거지.

하인즈 : (기계에 손을 올리며 바라본다. 자연스럽게 움직여 다시 앞을 본다) 당신들이 여기까지 오게 한 그 작품도 위스퍼레인의 역작이에요.

키샤 : 우린 급격히 변화한 꿈들에 대해 조사했을 뿐이야.

하인즈 : 그게 이 사업을 오직 위스퍼레인의 꿈으로 유지해온 결과죠! (관을 흘깃 본다. 안타까워하는 표정) 몇 년 전부터 꿈의 질이 떨어져 갔습니다. 생체 유지 시스템을 견디지 못한 사망자도 있었고요.

키샤 : 하지만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시설을 다시 한눈에 담고 과장되게) 사람이 꿈을 준다고 해도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동안 똑같은 주기로, 똑같은 분량의 꿈을 상영할 수 있었다니. 믿을 수 없어.

하인즈 : ‘연출’이죠. 제가 이걸 설명할 날이 오다니, 그걸 믿을 수 없군요...

 

INT. 꿈 추출실(과거)

다시 버나드와 하인즈의 대치상황. 그러나 조금 가깝다.

 

버나드 : 그래, 하인즈 자네가 이곳에 오게 한 그 작품도 위스퍼레인의 역작이지.

하인즈 : 그럼 이 사람은 기뻐하겠네요.

버나드 : 왜 그렇지?

하인즈 : 존경의 대상이 된 거잖아요. 저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습니다.

버나드 : 그녀는 그 사실을 모르지.

하인즈 : 어째서죠?

버나드 : 잠들어있으니까.

하인즈 : 꿈이라는 것은… 잠들 때 나오는 건가요.

버나드 : 자네는 무의식의 세계에 대해서도 모르겠군.

 

하인즈는 이름조차 알 수 없는 기계에 누운 이름뿐인 여인을 바라본다.

 

하인즈 : 무의식이고 꿈이고 지금 설명을 들을 시간이 없어요. 저는 그녀를 깨우고 싶습니다.

버나드 : 그렇게 했다간 사형일세. 자네가 여기까지 들어온 것도 내 덕분인데, 그 뒤로는 책임져주지 않아.

하인즈 : 저는 듣고 싶습니다. 이 사람은 어떤 세상에 살았고 무엇을 '연출'한 건지.

버나드 : 그래, 그러면 자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겠네.

하인즈 : 제안?

버나드 : 이 자리를 자네가 맡도록 해. 그러면 내가 아는 모든 것을 전수해주겠네. 이전 세대가 발견한 인간 속의 무의식과 꿈, 그리고 그것을 추출하는 방법을.

하인즈 : (눈에 띄게 동요한다)

버나드 : 그러면 네가 이 꿈들의 첫 관객이 되는 거야.

 

INT. 꿈 추출실(현재)

하인즈 : 그래서 저는 여기에 있고 여러분을 만난 겁니다.

키샤 : 자랑스럽게도 말씀하시는군.

하인즈 : 일단 전 여러분에게 이 시설이나 자리를 넘겨줄 생각이 없어요.

키샤 : (상대의 움직임에 경계한다)

하인즈 : 오히려 끝내주길 바라고 있어요.

 

키샤와 리, 잠시 놀란 듯 경계가 누그러진다. 하인즈는 아랑곳 않고 말을 잇는다.

 

하인즈 : 협상하죠. 저는 위스퍼레인을 이 긴 잠에서 깨우고 싶습니다. 오로지 그거면 돼요. 여러분을 있는 힘껏 도울 테니, 여러분은 정치적 파급을 일으켜서, 꿈의 상영을 필요 없게 만들어주세요.

키샤 : 사랑꾼 납셨군. 갑자기 그런 책임을 넘긴다고?

리 : 당신은 어찌 되었든 문화부의 중요 인사잖아. 게다가 몇 년을 꿈을 만들며 체제에 따랐어. 우리가 어떻게 믿지?

하인즈 : 저의 결백이나 진정성이 중요한가요? 지금 여러분에게 중요한 건, 제가 문화부 내부의 적이며 여러분의 친구가 될 의향이 있다는 거죠... 그러나, 이유가 무엇이든 위스퍼레인을 해치려고 하면 배신하겠습니다. 이 정도면 다루기 쉬운 사람이 아닌가요?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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