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화과
저팔계 × 염산옥 - 아야
*합작보다는 포스타입 글로 읽으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암전된 화면에 나오는 안내 문구. ‘본 상영물은 15세 이용가로, 약한 유혈과 욕설, 음주, 흡연, 납치, 상해 및 사망, 가정폭력, 폭력, 가스라이팅 요소가 담겨 있으니 관람 시 주의 바랍니다.’
scene 1. 기차역 앞. 낮.
화면이 밝아지면 주변을 연신 돌아보는 이가 있다. 어딘지 모르게 신경을 쓴 듯, 굉장히 꾸민 듯한 모양새다. 그가 휴대전화를 매만지다 다시금 주 변을 살피기 시작하면 들려오는 내레이션.
산옥 (N.A.) 나는 한 사람을 사랑한다. 지금 그 상대를 기다리고 있고, 그 역시 나를 사랑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산옥처럼 주변을 둘러보는 이가 등장한다. 이윽고 산 옥을 발견한 듯 웃는 그. 산옥은 그를 발견하고 화사한 웃음을 짓다 반 가움을 담아 손을 흔든다.
팔계 오랜만이에요, 산옥. 잘 지냈어요?
산옥 팔계 씨도 잘 지냈죠?
팔계 그럼요. 보시다시피.
산옥 가요. 배고프다.
팔계가 웃는 얼굴로 산옥 어깨를 감싸안고 걷는다. 산옥 은 그와 나란히 걸으며 따라 웃고 있다. 이윽고 산옥 쪽에 클로즈업 된 다. 웃으며 거리를 걷는 산옥과 팔계, 기차역이 천천히 멀어지고 잔잔한 음악이 깔리며 이윽고 화면 가운데에 보이는 타이틀 ‘무화과’.
scene 2. 술집. 밤.
산옥, 팔계에게 팔짱을 낀 채로 술집 안에 들어선다. 이윽고 가장 안 쪽 자리에 앉은 뒤에 손짓한다. 팔계, 그 손짓에 웃으며 마주 앉는다. 얼마 뒤 침묵이 흐르면 산옥이 먼저 입을 연다.
산옥 팔계 씨.
팔계 네?
산옥 우리, 여기서 그만 할까요.
팔계, 산옥이 한 말에 멈칫한다. 산옥은 그를 가만히 보고 있다. 당황한 팔계와 달리 차분하고 무덤덤한 표정. 산옥,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점원에게 음식 값을 지불한 채 술집을 나선다. 팔계는 그를 보고만 있 다. 산옥에게 클로즈업되면 그가 팔을 쓱쓱 문지르다 하늘을 본다.
산옥 춥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하늘을 보던 산옥이 길을 걸어간다. 기차역 방향이 다. 서서히 그의 모습이 점처럼 보이기 시작하다 사라진다.
scene 3. 기차역 앞. 아침.
캐리어를 질질 끈 채 앞으로 걸어가는 산옥. 불만이 가득하다. 팍팍, 소리 가 날 정도로 요란한 걸음걸이. 앞만 보고 걷던 그가 발걸음을 멈춘다.
산옥 아니, 그렇게 대단한 새끼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한테 맡겨야 하는 거 아니야? 이 새끼는 왜 나한테 난리야? 개놈 새끼. 술 처먹다 요단강이나 확 건너 버려라.
걸음을 다시 재촉하던 산옥,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려는 찰나에 팔계가 산 옥을 붙든다. 놀란 산옥, 슬쩍 고개를 돌린다. 눈에 보이는 팔계 얼굴. 그 러다 팔계에게서 시선을 돌려 휴대전화 사진첩을 뒤진다. 그러자 나오는 팔계 얼굴. 산옥, 멋쩍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산옥 아, 하하하. 감사합니다. 제가 앞만 보고 가다가 그만.
팔계 다친 곳은 없으세요?
산옥 네! 멀쩡해요, 보시다시피. 저기, 그러니까 이제 놔 주셔도 괜찮을 것 같 은데요.
팔계 아, 죄송합니다.
팔계, 산옥이 한 말에 붙들었던 손을 놓고 그를 살핀다. 그럴수록 멋쩍게 웃는 산옥. 팔계, 산옥 얼굴을 보다 문득 아래로 고개를 숙인다. 그러자 보이는 캐리어. 산옥, 팔계를 따라 캐리어를 향해 몸을 내린다.
팔계 외지인이시죠?
산옥 티가 많이 나나요?
팔계 여기는 사람이 잘 오지 않는 곳이거든요. 시골이라.
산옥 그렇구나.
팔계 여행 오신 거예요?
산옥 (고개를 가로젓고) 아니오. 요양 왔어요. 몸이 안 좋아서 공기 좋은 데에 있으면 좀 나을까 해서.
팔계 몸이 많이 안 좋으세요?
산옥 네, 조금. 아, 그렇지. 저 뭐 좀 여쭤보고 싶은데요.
팔계 말씀하세요.
산옥 근처에 모텔이나 숙박업소 같은 데 있나요? 아, 아니에요. 어디 가시는 길인 것 같은데 제가 너무 붙잡았네요.
산옥이 고개를 숙여 정중하게 사과하면 팔계, 괜찮다는 듯 손사래 친다. 그리고 캐리어를 대신 끈다. 산옥, 놀라 급하게 팔계를 좇는다.
팔계 괜찮아요. 도와드리지 못할 정도로 바쁘지는 않으니까요.
산옥 저기, 제가 들어도 되는데요. 그것보다 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
팔계 숙박업소 찾으신다고 했죠? 저희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곳이 있거든요.
산옥 제가 거길 가도 되나요? 저 엄청 오래 있으려고 하는데요.
팔계 네, 괜찮아요. 어차피 여기는 외지 분들이 잘 안 오셔서. 좋아하실 거예 요.
산옥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팔계 제 차가 근처에 있거든요. 타고 가시죠.
산옥 저 초면에 너무 큰 실례를 범하고 있는 기분이 드는데.
팔계 신경 쓰지 마세요. 저도 오랜만에 외지인을 봐서 신기하거든요.
산옥 그렇게 신기한 일인가요?
팔계 네, 여기는 98%가 예전부터 사셨던 분들이거든요. 저도 그렇고.
금방 눈에 띄는 차. 팔계가 트렁크에 캐리어를 싣고 두 사람이 차에 오 른다. 이윽고 출발하는 차.
scene 4. 동네 슈퍼 앞. 낮.
작은 슈퍼에서 산옥이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나온다. ‘안녕히 계세요.’ 라고 하지만 아이스크림 탓에 뭉개지는 소리. 하늘로 시선을 올리다 입에 서 떨어져 바닥에 꽂히는 아이스크림. 허탈한 산옥의 표정이 잡힌다. 체 념하고 머리를 묶으려는데 누군가 그에게 다가온다. 산옥이 슬쩍 뒤돈다.
산옥 팔계 씨, 머리 묶을 줄 아세요?
팔계 네, 누나 자주 묶어줬어요.
산옥 누나분이 계시구나. 누나분도 여기 사세요?
팔계 아뇨. 지금은 결혼해서 도시로 이사 갔어요.
산옥 그렇구나. 조금 섭섭하시겠어요, 누나분이 없으니까.
팔계 그렇기는 하지만, 저는 이곳을 좋아해요. 자, 됐어요.
팔계가 자신의 휴대전화를 산옥에게 내민다. 셀프 카메라 기능으로 머리 묶인 양을 본 산옥,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짧게 숙여 보인다. 그리고 손 에 들고 있던 봉투를 건넨다. 팔계, 그 안에서 무언가를 집어 든다. 산옥 이 팔계 손에 있는 무화과를 발견한다.
팔계 나머지는 산옥 거예요.
산옥 제가 먹어도 되나요?
팔계 그럼요. 그런데 여기서 계속 먹을 수는 없으니 어디 다른 데로 갈까요?
팔계, 산옥에게 앞을 눈짓한다. 산옥, 고개를 주억이며 그를 따라 나서면 어느새 맞춰지는 발걸음. 말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둘이 웃는 모습이 포착 된다.
scene 5. 숙소 안. 밤.
불이 커져 있는 숙소 안, 산옥이 의자에 앉아 수첩에 뭔가를 적고 있다. 카메라가 수첩으로 줌인되면 ‘저팔계’, ‘22세’, ‘도원향에서 현재 의사로 재직중. 누나가 결혼해 도시에서 산다고 하는데 확실하지 않음.’ 이라고 적혀 있다. 생각에 잠긴 산옥. 뭔가 떠올랐는지 입꼬리를 슬쩍 올린다.
scene 6. 병원. 낮.
산옥이 팔계와 함께 점심을 먹고 있다.
팔계 그러고 보니 제가 어제는 실수했네요.
산옥 왜요?
팔계 무화과를 처음 먹어본 사람에게 너무 많이 준 것 같아서요.
산옥 아니라고 하고 싶었는데 안 되겠네요. 게다가 그거 생으로 오래 못 먹는다 면서요.
팔계 (고개를 끄덕이며) 미안해요.
산옥 미안할 것 까지야. 덕분에 점심 맛있게 먹고 있으면 됐죠. 팔계 씨가 직접 도시락 싼다는 건 좀 의외였지만.
팔계 나한테는 산옥이 요리를 못하는 게 의외네요.
산옥 맛만 있구먼, 뭐. 그리고 의사 선생님들도 바쁘면 이런 거로 떼우잖 아요?
후루룩, 하고 산옥이 컵라면 먹는 소리. 팔계, 식사를 멈추고 가만히 산옥 을 보고 있다. 산옥은 신경도 안 쓰고 국물까지 비운다.
산옥 왜요?
팔계 몸이 아파서 온 건 아닌 게 분명한 것 같네요.
산옥 당연하죠. 라면까지 먹을 정도인데.
팔계 그럼 어디가 아파서 온 거예요?
잠시 침묵. 얼마 지나지 않아 산옥이 장난스레 대꾸한다.
산옥 마음?
scene 7. 숙소 안. 밤.
산옥이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다.
산옥 응, 자주 만나서 이야기라도 해 보고 있어. 하다 보면 입이 열리겠지.
목소리 넌 그렇게 상황이 한가한 줄 아냐?
산옥 그래도, 보스가 시간을 3개월이나 줬다는 건 정보 캘 시간도 포함시키라는 의미일 거 아니야. 걱정 마. 나도 그 정도 계산은 할 줄 알아. 헛짓거리는 한 달 안에 끝낼 거야. 그럼, 수고해.
전화가 끊어지고 산옥이 주머니를 뒤적인다. 집히는 담배 케이스.
산옥 그래도 페이스가 괜찮아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척도 못할 뻔했네.
담배를 확인한 산옥. 방을 나선다. 문 닫히는 소리.
scene 8. 거리. 아침.
무릎에 피가 맺힌 채로 산옥이 자전거 뒤를 매섭게 쫓고 있다.
산옥 야, 이것들아. 거기 안 서!
아이들 뛰어서 자전거 못 잡을 걸요. 메롱.
산옥 잡히면 죽는다, 진짜. 내가 한다면 하는 인간이야! 알아?
자전거 운전석에 탄 아이가 속력을 높인다. 산옥, 아이들을 뒤쫓아 가려는 데 누군가 산옥을 붙든다. 씩씩거리며 뒤를 돌아보니 팔계가 뒤에 있다.
팔계 다쳐서는 어딜 쫓아가려고 그래요?
산옥 근데 저것들이 열 받게 하잖아요! 사람이 좋게 좋게 말하니까.
팔계 알겠어요, 알겠어. 나중에 제가 잘 이야기할게요. 일단 가요.
산옥 어딜 가요?
팔계 어디긴요. 병원이지.
산옥 이거 까진 정도로 뭘 병원까지 가요?
팔계 큰일 날 소리를 하네. 파상풍 걸린다고요. 자, 갑시다.
팔계, 단호하게 산옥 손을 잡고 병원 방향으로 이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던 산옥. 몰래 웃고는 잡힌 손에 깍지를 낀다. 팔계, 순간 멈칫하면 산옥 이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이 웃고 있다.
scene 9. 숙소 안. 밤.
산옥 무릎에 반창고가 붙어 있다. 그가 침대에 누워 있은 지 얼마 되지 않 아 전화가 걸려 온다.
산옥 네.
팔계 뭐 해요?
산옥 자려고요. 팔계 씨는요?
팔계 저도 자려던 참이었어요.
산옥 그런데 지금 전화해도 돼요? 출근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팔계 잠깐은 괜찮으니까요. (잠시 침묵) 산옥.
산옥 네?
팔계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산옥 뭐예요. 싱겁게.
산옥, 팔계 이야기를 기다리며 침대에 누우면 풀썩, 소리가 난다.
산옥 아, 아까 신경 쓰였어요?
팔계 네?
산옥 손에 깍지 낀 거. 그런데 본인이 먼저 잡아 놓곤.
팔계 (부끄러움에 약간 새된 목소리로) 손잡는 거랑 깍지 끼는 건 다르잖아요!
산옥 에이,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래요. 자기 꽤 고루하구나?
팔계 자……!
산옥 정말이지. 손 좀 잡는다고, 깍지 좀 낀다고 안 잡아먹히는데. 알았어요. 적 당히 할게요. 난 친구라 생각해서 편하게 대한 건데 부담스러우면 어쩔 수 없죠.
팔계 ……정말, 친구 대하듯이 한 거예요?
산옥 아무렴 정말 연인 대하듯 한 걸까 봐요? 팔계 씨가 잘생긴 건 사실이지만, 저도 연애 감정은 오래 지켜보고 품는 사람이에요. 안심해요, 안심. 답 다 들었으면 얼른 주무세요. 출근하는 사람은.
팔계 알겠어요. 산옥도 좋은 꿈꾸세요.
산옥 네, 굿나잇.
전화가 끊어지면 산옥, 픽 웃으며 휴대전화를 본다. 휴대전화로 줌인되면 ‘저팔계’라는 발신인 이름이 보인다.
산옥 꽤 귀여운 구석이 있네.
scene 10. 가로등 아래. 아침.
가로등 아래에서 흡연하며 통화중인 산옥. 그를 옥을 향해 손을 흔들려다 눈을 가늘게 뜨고 다가가려는데 들려오는 말에 우뚝 발걸음을 멈춘다.
산옥 (키득 웃으며) 귀찮게 진짜. 옆에서 비뚤어진 사랑 구경한 덕분에 거기에 나도 맞춰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난 그런 취향 아니라고 했잖아. 왜 답지 않게 응석이야?
산옥, 담배 연기를 내뱉고 말이 없다 장난 반, 진심 반인 말투로 덧붙인 다.
산옥 나한테 사랑한다는 말이 듣고 싶으면, 날 정말 사랑해 봐. 갖고 놀고 싶 어하는 거 눈에 다 보여서 짜증나니까.
산옥, 조용히 담배 연기를 한 번 더 내뿜다 팔계를 마주한다. 평소와 다 르게 웃지 않고 가만히 목례만 한다. 이윽고 그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간 다. 팔계, 산옥을 붙잡지 못한 채 그대로 멈춰 서 있다.
scene 11. 지하실. 밤.
산옥, 지하실에서 보호구를 착용 후에 사격 중이다. 정 가운데 부근에 맞는 탄환. ‘탕’하는 소리가 연거푸 들린다. 그것을 뒤에서 팔짱 낀 채 바라보는 모자 쓴 이(이하 모자). 탄환을 충전하려다 인기척을 느낀 산 옥, 모자 쪽으로 총구를 겨눈다.
모자 (여유롭게 웃으며 양 손을 들고) 쏠 거야?
산옥 (키득 웃으며 모자에게 총을 던진다.) 네가 쏠래?
모자 (총을 매만지다 허공에 방아쇠를 당기고) 뭐야, 없었네.
산옥 있는 줄 알았어? 쫄았나 봐? 쫄았지?
모자 까불지 마. 사람 한 번 쏴 본 적도 없는 주제에.
산옥 조심해. 그 첫 상대가 부보스일 수가 있어.
모자 아이고, 무서워라.
모자, 산옥 머리를 부스스하게 헝클어뜨리면 산옥이 눈을 흘긴다. 산옥, 모자 가슴팍을 팔꿈치로 내려찍으면 들리는 고통스러운 신음. 그것에 개 의치 않은 산옥이다.
산옥 그래서, 사람을 잡아오거나 죽이거나 둘 중 하나만 하면 된다는 거지?
모자 바로 그거야.
산옥 보스가 드디어 내 정신머리를 제정신이 아닌 거로 판단하셨나봐. 그런 미션을 던지신 거 보면. 실패하면 물론 내가 요단강에 끌려가겠지만. 그 래서.
모자 어?
산옥 뭐하는 인간인데? 내가 잡아오거나, 죽여야 하는 인간 말이야.
scene 12. 동네 커피숍(다방). 낮.
산옥, 커피숍에 들어가 음료를 주문하려 한다. 그러다 문득 무화과 타르 트가 눈에 들어온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그것과 음료를 주문한다. 주문 이 끝나기가 무섭게 들려오는 풍경 소리. 안에 들어오는 팔계와 산옥, 눈이 마주친다. 조금은 어색한 눈치.
산옥 안녕하세요, 팔계 씨. 외근 갔다 오시나요?
팔계 아, 네.
잠시 침묵이 흐르는데, 산옥이 주문한 음식이 나온다. 산옥, 음식을 받아 들고 테라스로 향하며 짧게 목례한다. 음식이 올려진 쟁반을 상 위에 올 려 놓고도 멍한 산옥. 잠시 후, ‘드르륵’하는 소리가 들리면 팔계가 주문 한 음식을 놓고 맞은편에 앉는다. 다시금 침묵.
산옥 잔소리 할 줄 알았는데 안 하네요.
팔계 네?
산옥 어제 담배 피우다 마주쳤잖아요.
팔계 아.
산옥, 잔에 든 빨대를 휘휘 젓는다. 음료 한 모금을 쭉 들이켠다. 그런 산옥에게 팔계, 손을 내민다. 어리둥절한 산옥, 잠시 그를 쳐다보다 주머 니 속 담뱃갑을 꺼내 건넨다. 팔계, 담뱃갑을 열면 세 개비 남아 있는 게 잡힌다. (줌인) 그리고 무화과 타르트에게 시선이 잡힌다.
팔계 무화과가 입에 안 맞는 것 아니었어요?
산옥 그건 그런데, (잠시 침묵) 어제의 팔계 씨를 생각하니까 저도 모르게. 아, 맞다.
산옥, 팔계 손을 잡아 끌어 무릎께에 대면 까실한 감촉이 느껴진다. 팔 계, 조금은 놀란 얼굴이었지만 곧 다행이라는 듯 웃는다.
팔계 약 잘 바르고 있었나 보군요.
산옥 고루한 의사 선생님 마음에 들려면 이 정도는 해야겠더라고요.
팔계 잘했다고 칭찬해 줄까요?
산옥 뭐예요, 그 아이 대하듯이 하는 말투는.
작게 키득이곤 슬쩍 시선을 내린다. 여전히 산옥 무릎에 닿아 있는 팔계 손. 산옥이 먼저 손을 떼면 그제야 팔계도 손을 거둔다. 상 위에 올려진 두 사람의 손. 산옥이 무화과 타르트를 집어 한 입 베어문다.
팔계 맛있어요?
산옥 네. 역시 당분이 부족했나 봐요. 설탕이 좀 들어가니까 맛있네.
산옥이 무화과 타르트를 계속 먹고 있는 것을 보는 팔계.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면 산옥, 슬쩍 타르트를 내린다. 곧 닿아오는 입술. 산옥, 흠칫 놀 라지만 피하지 않는다. 그저 스르르 눈을 내리감고 팔계 등에 손을 올릴 뿐이다.
scene 13. 산옥의 방. 아침.
눈을 뜬 산옥. 몸을 일으켜 얼굴에 손을 묻은 채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낸다. 한참 그렇게 있던 그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팔계가 곧은 자 세로 누워 있다. 산옥, 그런 그를 보고 있다 슬쩍 다시 몸을 뉘여 품에 기댄다. 그리고 그를 향해 시선을 올리더니 뺨을 쿡 찌른다. 미동 없던 팔계. 두 번째로 찔려지자 눈을 뜬다.
팔계 (산옥 쪽으로 몸을 돌리고) 잘 잤어요?
산옥 덕분에요. 슬슬 출근하러 가셔야죠, 선생님?
팔계 산옥은 꼭 간호사 선생님처럼 말하네요.
산옥 하지만 일하는 사람은 팔계 씨 뿐이잖아요. 저랑 둘 중에서는.
팔계 그거야 그렇죠.
산옥, 팔계에게 얌전히 입맞춤을 받는다. 팔계,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한다. 수돗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끊어지면 그가 나온다.
팔계 아, 그러고 보니 도시락 싸는 걸 잊었네요. 오늘은 간단하게 샌드위치라 도 사야겠어요.
산옥 사다 줄까요?
팔계 그래주면 고맙죠.
산옥 그 대신 오늘은 팔계 씨 이야기를 해 주는 거로?
팔계 재미있는 것도 딱히 없을 텐데.
산옥 좋아요, 그러면 내 이야기도 해 주고요.
팔계 그럼 이따 점심에 보는 거로 해요.
산옥 네.
산옥, 팔계가 했던 것처럼 짧게 입을 맞추고 나서 그와 잠시 눈을 맞춘 다. 둘 사이에 달큰한 기류가 흐른다.
scene 14. 누군가의 방 안. 밤.
차가운 분위기가 흐르는 방 안. 주홍빛 전등 아래에 있는 셋. 팔계와 팔계 를 닮은 이(화남), 그리고 노인이다. 다과상이 차려져 있고, 차를 마시던 셋. 그 중 노인이 차를 마시다 찻잔을 탁 내려놓는다.
노인 누구 마음대로!
팔계 어르신. 시대는 변화합니다. 백택은 저물고 맥이 떠오르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하셔서 살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노인 어딜 건방지게 입을 놀려!
화남 (팔계의 팔을 붙잡고) 팔계, 그만해.
팔계 맥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저나 화남도 백택의 은 혜를 입은 사람들이니까요. 제가 제안 드리고픈 이야기는.
노인 듣기 싫다!
팔계 쪽으로 던져진 잔. 그가 솜씨 좋게 피하면 벽에 부딪쳐 깨진다. 무작 위로 던져지는 물건들. 팔계에게 단 하나도 닿지 않자 노인, 칼집에서 칼 을 빼 화남 쪽으로 들이대려 하면 팔계, 화남을 데리고 급하게 방을 빠져 나가려 한다. 팔계 팔뚝에 스친 칼날. 피가 흐르지만 팔계, 개의치 않는다.
scene 15. 병원. 낮.
산옥, 팔계에게 약속한 샌드위치를 사서 병원에 온다. 노인을 치료하고 있 던 팔계. 산옥을 발견하고 웃는다. 진료가 마치기를 기다리는 산옥. 얼마 지나지 않아 진료가 끝나고 간호사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한다. 그러면 산 옥, 팔계에게 다가가 책상 위에 샌드위치를 놓는다.
산옥 뭐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서 아무거나 사 왔는데 괜찮죠?
팔계 네, 괜찮아요. 잠시만요.
팔계, 가운 소매가 걸리적거리는지 슬쩍 소매를 접어 올린다. 그러자 보이 는 문신. 산옥, 그 문신을 유심히 본다. 팔계, 시선을 느끼다 빙긋 웃는다.
팔계 의사 선생님이 하기에 좀 과격한 문신이기는 하죠?
산옥 뭐, 그렇기는 한데. 환자분들은 안 놀라시나요?
팔계 처음에는 놀라셨는데, 이제 익숙해지신 것 같더라고요. 다쳐서 메웠다고 하니까.
산옥, 그가 하는 말에도 가만히 문신을 마주한다. 이윽고 아무렇지 않게 포장을 벗겨 팔계에게 내민다. 그러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린다.
scene 16. 산옥의 방 안. 밤.
산옥,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며 생각에 잠겨 있다. 말이 없는 그. 뿌연 연 기가 뿜어져 나온다. 오버랩되는 팔계의 문신. 그리고 그것을 보고 있는 산옥의 모습. 산옥, 베란다에서 빠져나와 상 위에 올려진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끈다. 그리고 입고 있던 옷을 살짝 벗어 어깨가 드러나게 한다. 그러 자 보이는 검은빛 문신. 산옥, 거울에 문신을 비춰 보다 다시 옷을 제대로 갖춰 입는다. 그리고 뭔가 결심한 듯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다.
scene 17. 지하실. 밤.
산옥, 모자와 마주 앉아 있다. 차분한 듯 냉랭한 기색이 감도는 얼굴을 하 고 있다.
산옥 내가 볼 때, 하나는 무조건 못 잡아.
모자 네 목숨줄 생각은 안 하냐?
산옥 내 목숨줄 생각하고 있으니까 말하는 건데? 백택의 매드닥터가 숨긴 사람 을 잡아 와라? 그게 쉬울 것 같아? 만약에 그 숨긴 사람이 별 볼일 없는 쪽이면 그걸 살리는 게 낫잖아?
모자 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매드닥터 저오능을 죽이겠다고?
산옥,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모자, 산옥의 태도에 경악한 눈치다.
산옥 거슬리는 건 싹을 잘라야 하는 법이잖아?
모자 잘못하면 네가 진짜 뒤진다고. 그 생각은 안 해?
산옥 한다고 몇 번을 말해야 해? 내 얘기 들어 봐. 만약에 저오능이 살고 그 숨겨진 누군가를 내가 죽인다고 치자. 그러면 그 자가 가만히 있을 것 같 아? 나뿐만이 아니야. 맥 전체를 죽이겠다고 덤벼들 거라고. 백택의 수장 까지 죽였다는 자가, 마음먹으면 뭘 못할 것 같아?
모자, 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다문 채 산옥을 보고만 있다. 산옥, 태연한 얼 굴로 그를 보고 어깨를 으쓱인다.
산옥 난 어쨌든 맥에서 다시 태어난 존재고, 맥은 나를 여태까지 길렀어. 걱정 하지 마. 나는 맥으로 죽을 거니까. 뭐, 그래도 그 사람을 찾는 척은 해야 겠지.
모자, 여전히 말이 없다. 한참을 산옥을 응시하기만 한다. 한숨을 푹 쉰 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타이틀곡.
scene 18. 시가지. 낮.
산옥, 담뱃갑을 빙글빙글 돌리며 걷고 있다. 들떠 있는 기색. 얼마 지나지 않아 다가오는 한 사람.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이하 선글라스)
선글라스 다 때려치우고 올라온 줄 알았더니 아닌가 봐?
산옥 내가 그럴 인간으로 보이냐? 그래도 나름 맥의 개라고. 가져온 거나 내 놔.
선글라스. 구석진 곳으로 가 산옥에게 태블릿 pc를 내민다. 태블릿 pc 속 에 담겨 있는 팔계와 화남의 정보. 손으로 화면을 휙휙 넘기는 산옥. 잠 시 화면을 응시하며 묻는다.
산옥 어떤 것 같아?
선글라스 뭐가?
산옥 저오능 말야. 맥이랑 동맹을 맺고 싶어 했으면서 왜 자기 보스를 죽이고 도망갔을까? 백택의 차기 보스 격이잖아. 맥하고 동맹할 수도 있었고.
선글라스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는데. 확실한 건 아니지만, 보스하고 연관되어 있을지도 몰라.
산옥 보스? 우리 보스?
선글라스, 산옥이 되묻자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태블릿 pc 화면을 한 번 더 넘긴다. 눈에 보이는 건 화남의 다리에 새겨진 문신. 팔계 팔에 있 던 백택의 것과 달리 맥에 가까운 모양이다. 정확하게는 백택 위에 맥의 문신이 겹쳐진 것만 같다. 심각한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는 산옥.
산옥 뭐야, 이거.
선글라스 이상하지?
산옥 어엉.
선글라스 이렇게 문신을 새기도록 할 수 있는 건 각 조직의 보스밖에 없겠지? 저오 능이 만약 제안을 했다면 모를까.
산옥 제물과 같이 여긴 거야, 그거.
선글라스 제물이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산옥 그런 게 있어. 화남이라고 했던가? 이 사람.
선글라스 엉.
산옥 위치는 잡혀?
선글라스 전혀. 안 그래도 사무실에 있는 놈들이 GPS 추적을 하고 있는데 안 잡히 는 것 같대. 생존반응 찾으려고 은행도 뒤지는데 소용없어.
산옥 어디다 숨겼을까. (태블릿 pc를 툭툭 두드리며) 멀리 숨기지는 못했을 텐 데.
선글라스 그런데 넌 괜찮아?
산옥 뭐가?
선글라스 저오능하고 재미 봤다며.
산옥 재미는 재미고, 일은 일이니까.
산옥, 선글라스에게 태블릿 pc를 넘긴다. 그리고 천천히 카페 쪽으로 걸 어간다.
산옥 뭐 마실래?
선글라스 네가 그렇게 한가한 줄 아냐?
산옥 싫음 말아.
산옥, 선글라스를 지나쳐 카페로 향한다. 문을 열자마자 들려오는 목소리.
산옥 아이스티하고 무화과 타르트 하나 주세요.
scene 19. 병원. 낮.
팔계, 멍하니 창밖을 응시하고 있으면 보이는 새 떼들. 그러나 금방 날아 가고 주변이 적요해진다. 그 때 들리는 전화벨 소리.
팔계 여보세요.
화남 건강해?
팔계 무사해요, 아직은. 화남은요?
화남 나도 아직은.
하지만 곧 목소리를 낮춰 오는 화남.
화남 그렇지만 예감이 좋지 않아.
팔계 무슨 뜻이에요?
화남 뭔가, 집요해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한숨 쉬고) 맥 움직임 말이야.
팔계, 화남 이야기를 들으며 멍한 표정이 차갑게 굳는다.
팔계 이름도, 외관도, 개인정보까지도 위조되어 있어서 지금 당장은 어떻게 피 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으로는 분명 한계가 있겠죠. 다른 방법을 찾아 볼게요.
화남 응, 부탁해. 그러고 보니 오능.
팔계 네?
화남 괜찮아? 그 사람. 떠났다면서.
팔계 아아, 네.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말아요. 화남은 그저 잘 숨어 있기만 해요.
화남 그건 걱정 마. 최대한 밖에 쏘다니지 않으려고 애쓰니까. 신경 써 줘서 고마워.
팔계 별 말씀을.
전화가 끊어진다. 팔계, 휴대전화 화면을 바라보면 화면에 ‘은수’라고 적 혀 있다. 한숨을 쉬는 팔계. 의자에 기대어 슬쩍 눈을 감는다.
scene 20. 노인의 방 안과 건물 밖. 밤.
‘탕’하고 들린 총소리. 놀란 화남, 덜덜 떨며 팔계를 붙들고 있 다. 화남과 다르게 평온한 얼굴의 팔계. 무미건조한 얼굴로 노인을 보다 입을 연다.
팔계 죽었네요.
화남 어쩔 생각인 거야. 나머지가 찾으러 오면 어쩌려고!
팔계 당신은 이미 많은 희생을 치렀어요. 더 이상 치르게 두지 않을 겁니다. 가죠.
화남 어디로 갈 건데!
팔계 알아본 곳이 있습니다. 따라 와요.
팔계, 화남을 데리고 차로 향한다. 둘이 차에 탄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들을 추격하러 패거리들이 몰려온다. 팔계, 막힘없이 액셀을 밟는다. 한 바탕 이어지는 추격전. 화남은 여전히 긴장한 기색이지만 팔계는 건조 하기만 하다.
scene 21. 지하실. 밤.
산옥, 냉랭한 얼굴로 누군가를 보고 있다. 잔뜩 겁에 질려 있는 상대(흥 신소 직원). 그를 보던 산옥, 주머니에서 담배를 집어 입에 문다. 라이터 로 불을 붙이면 올라오는 연기. 산옥, 그것을 천천히 내뿜는다.
산옥 골치가 아프네. 떠나기 전에 정보를 다 빼냈어야 했나.
흥신소 직원 어, 어떻게 할까요? 좀 더 찾아볼까요?
산옥 됐어, 됐어. 그만큼 숨기고 싶다는 의미는 명확하니까.
산옥, 여전히 담배를 피우며 생각에 잠겨 있다. 끄트머리를 치아로 잘근 거리는 그.
scene 22. 정자 위. 낮.
팔계와 산옥, 정자 위에 앉아 있다. 무화과를 까먹는 둘. 이전에 비하면 산옥, 꽤나 잘 먹고 있는 모습이다. 한 개를 집어 팔계에게 내미는 산옥.
팔계, 그것을 받아든다.
산옥 그러고 보니, 여기는 원래 무화과가 유명한 거죠?
팔계 그것도 있고, 제가 좋아하기도 하고요. 아, 그렇지. 그거 아나요, 산옥?
산옥 어떤 거요?
팔계 무화과라는 게. 꽃이 없는 과실(無花果)이라는 뜻이잖아요? 그런데 사실, 우리가 먹고 있는 게 꽃이에요.
산옥 이게요?
산옥, 껍질을 벗기면 무화과 알맹이가 보인다. 팔계, 그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인다.
산옥 신기하다. 그러면 무화과가 아니라 ‘무실과(無實果)라고 해야 하는 거 아 닌가.
팔계 그렇게 보면 특이하죠? 꽃이지만 마치 열매인 것처럼 여겨지잖아요. 자 신은 속이려고 하지 않았는데 남들이 그렇게 인식하는 거니까.
산옥 동물은 항상 그런 걸 신경 쓰잖아요. 자기가 비춰지고 싶은 면들을 골라 서 가면을 쓰기도 하고요. 팔계 씨.
팔계 네?
산옥 만약, 당신에게 비춰지고 있는 내가 일부분이라면 어떻게 할 거예요?
팔계 보통 인간들이 다 그렇겠지만, (산옥을 보고) 저는 그 일부도 결국 당신 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산옥, 팔계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 시선을 허공에 돌린다. 들려오는 허밍. 팔계, 그를 보고 있다가 따라 허공을 바라본다.
팔계 왠지 구름에 은색이 돌고 있는 기분이 드네요.
scene 23. 지하실. 밤.
산옥, 흥신소 직원과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다.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내 는 산옥. 담배에 불을 붙인 그. 흥신소 직원에게도 불을 내밀지만 거절 당한다.
산옥 ‘은’이라는 이름자가 들어가는 사람이 워낙 많은 건 나도 알고 내 쪽도 성실하게 찾을게.
흥신소 직원 (한숨) 많기는 많겠죠. 그래도 찾아야지 않습니까?
산옥 응. ‘은’이라는 이름자가 들어가고 날씨에 상관없이 긴바지를 입는 사람.
흥신소 직원 찾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산옥 그래, 수고.
흥신소 직원, 자리에서 일어나 산옥에게 목례를 한다. 산옥, 가벼운 눈짓 한다. 그가 나가고 문 닫히는 소리.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끈다.
scene 24. 모 주택가. 밤.
화남, 주택가에 즐비한 집들 사이에서 한 곳에 들어서면 누군가 화남을 끌어당긴다. 자연스럽게 품에 안기는 화남. 여전히 불안한 기색이다. 그 것을 눈치챈 이(약칭 차 경장)가 화남을 다독인다.
차 경장 매제는 괜찮을 거예요. 약한 사람도 아니고.
화남 알고 있어요. 알고 있는데, 불안한 건 어쩔 수가 없나 봐요.
차 경장 매제 쪽은 우리도 지켜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화남, 차 경장 품에 얼굴을 묻고 한참이나 말이 없다. 그렇지만 점차 안 정감을 찾아가는 모습이다.
scene 25. 경찰서 취조실. 밤.
취조실에 있는 팔계, 화남, 차 경장. 경장,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매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
차 경장 그래서, 당신이 백택의 수장을 죽였다는 게 사실입니까?
팔계 네.
차 경장 그렇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것이며, 그렇게 한 당신이 내게 자백하 는 이유는요?
팔계, 망설임 없이 장갑을 끼더니 가방에서 총과 피가 묻은 수건 하나가 담긴 비닐을 꺼내 그에게 내민다.
팔계 제가 감옥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화남의 신변 보호를 요청합니다.
차 경장 허?
팔계 차 경장님에 관련된 이야기는 익히 들었습니다. 검소하시고, 옳지 못한 일에 어느 누구보다 먼저 뛰어드신다고요. 범죄자의 말을 백 퍼센트 신 용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은 잘 압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선택은 저희에 게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
팔계,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하면 화남,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차 경 장, 차분하게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scene 26. 후미진 골목. 밤.
어린 팔계와 화남, 서로 손을 맞잡은 채 정처 없이 달리고 있다. 화남, 한참 달리다 넘어지면 놀란 팔계, 서둘러 화남을 챙긴다.
팔계 괜찮아?
화남 응, 괜찮아. 얼른 가자.
팔계 천천히 가도 돼. 다치지 않게 가도 괜찮아.
화남 안 돼!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지르곤) 다시는, 다시는 그 집으로 돌아가 고 싶지 않아. 얼른 가자. 얼른. 데리고 가 줘. 응? 팔계.
팔계, 화남의 말에 놀란 눈으로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윽고 등 을 돌린다.
팔계 업혀. 뛸 거니까 꽉 잡고.
화남 응!
화남, 재빠르게 팔계에게 업히면 이윽고 꽉 붙들어 오는 화남의 손. 얼 마 지나지 않아 몽둥이를 든 채 뒤따르는 어른들. 팔계 남매와 닮은 것 으로 보아 양친인 듯하다. 팔계와 화남, 그들을 발견하고 팔계, 속도를 높여 달리기 시작한다. 가로등이 둘을 비추면, 둘 몸 곳곳에 보이는 상 흔들.
scene. 27. 경찰서 취조실 밤.
다시 취조실. 이야기를 듣던 차 경장, 점점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지 말 없이 그들을 보고만 있다. 그러다 문득 고민하는 듯 손가락으로 탁자를 몇 번 두드린다.
차 경장 도와주죠.
팔계 정말이십니까?
차 경장 대신 당신이 먼저 제안했듯 저오능 씨, 당신이 감옥에 들어가야 함은 물 론이고 당신과 화남 씨가 속해 있던 백택의 정보도 함께 제공해야 할 겁 니다.
팔계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모든 정보는 제공해 드릴 겁니다.
scene 28. 감옥. 낮.
팔계, 감옥 안에서 가만히 책을 보고 있다. 그러면 얼마 지나지 않아 들 려오는 목소리.
간수 8169번. 면회다.
팔계, 그 이야기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간수를 본다. 책을 덮고 일어서는 그. 읽고 있던 책으로 줌인되면 보이는 ‘성경’이라는 제목.
scene 29. 면회실. 낮.
팔계, 면회실로 가면 화남과 차 경장이 있다. 차 경장, 팔계가 들어오면 화남과 함께 맞은편에 앉는다.
차 경장 화남 씨와 혼인신고서를 작성했다는 이야기를 전하러 왔습니다.
팔계 아, 그런 쪽으로…….
차 경장 경장의 배우자라고 하면 아무도 쉽게 건드리지 못할 겁니다. 그것도 그렇 고, 화남 씨의 의지도 반영되었고요.
화남, 차 경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화남 내가 경장님께 볼모로 잡혀 들어간 건 아니야. 그럴 생각도 없었고, 단지.
팔계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으니까 더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차 경장 금방 나올 수 있을 겁니다. 어쨌든 당신이 살아 있어야만 맥에 접근할 수 있으니까.
팔계, 고개를 몇 번 주억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는 화남 과 차 경장. 얼마 지나지 않아 팔계 역시 자리를 뜬다.
scene 30. 주택가. 밤.
산옥, 길을 걷고 있다가 우뚝 고개를 든다. 빼곡하게 자리잡은 주택들을 주욱 훑어보던 그, 어느 집에 멈춰 선다. 바닥에 보이는 택배 상자. 그 곳 에 적혀 있는 ‘은수’라는 이름.
산옥 은수, 은수라…….
이름을 되뇌던 산옥, 문이 열리자 후다닥 발을 옮겨 전봇대 뒤로 몸을 숨 긴다. 그리고 슬쩍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화남. 산옥, 찾았다는 생각에 저 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화남이 택배 상자를 들고 안으로 들어가면 산 옥, 전봇대에서 벗어나 화남의 옆집으로 문을 두드린다. 그러면 나오는 옆집 주민.
산옥 안녕하세요, 말씀 좀 묻겠습니다.
scene 31. 지하실. 밤.
담배를 피우는 산옥과 모자.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는 모자는 혀를 짧 게 찬다.
모자 자기 살겠다고 짭새한테 붙는 새끼라니. 머리가 어떻게 됐나.
산옥 어쩔 거야?
모자 뭘.
산옥 보스한테 말은 해야 할 거 아니야.
모자 했어.
산옥 뭐라시는데?
모자 그 여자는 포기하라고. 대신, 그 놈이 거기 붙는 일은 없게 하라셨어.
산옥 아아, 그렇겠네.
산옥, 따라서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끈 뒤 자리에서 일어난다.
모자 어디 가?
산옥 잡으러.
scene 32. 병원 안. 밤.
야간 진료를 마친 팔계. 퇴근하려 나서려는 순간, 그를 막아 세우고 주 먹을 갈기는 누군가. 하지만 팔계, 빠르게 주먹을 막는다. 그러나 이윽고 발길질이 이어진다. 그 또한 막아내는 팔계. 상대는 결코 물러서지 않고 그를 제압하려 한다. 한참의 실랑이 후 결국 상대가 먼저 나가떨어진다. 팔계, 상대의 손목을 확 낚아채고 다른 손으로 꺼 뒀던 불을 켜면 드러 나는 산옥의 얼굴. 팔계, 놀람과 충격. 미묘한 불쾌감으로 그를 보고 있 다.
팔계 무슨 짓인가요? 그렇게 떠나고 다시 돌아와서는 하는 일이, 고작 나를 해 치려는 것뿐인가?
산옥 쥐새끼같이 짭새한테 붙은 백택의 머리가 할 말은 아니지.
팔계 그래서, 맥의 개는 안녕히 잘 지냈던 모양이죠?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압박을 가할 생각이었나?
산옥 서로 이용해먹던 사이에 이제 와 그런 말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 네.
붙잡힌 손목에도 산옥, 팔계를 향해 발길질하면 정확하게 명중한다. 팔계,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지르면 자신을 잡고 있던 손목도 풀어버리고 팔계를
압박하기 시작한다. 허나 쉬이 당하지 않는 팔계. 끝까지 저항하다 산옥 을 향해 주먹을 날린다. 산옥, 비명과 함께 나동그라지면 팔계, 산옥을 잡 아 끌어 밖으로 나선다. 그런 그들을 지켜보는 어느 누군가.
scene 33. 차 안. 밤.
매서운 속도로 차를 모는 팔계, 뒤를 따라오고 있는 차량을 눈치 채고 백 미러에 시선을 꽂은 채다. 산옥, 차 안에 있는 무화과를 까먹고 있다. 백미러에서 눈을 돌린 팔계. 산옥을 보고 어이가 없다는 듯 키득거린다.
팔계 당신 너무 아무렇지 않은 거 아닌가요?
산옥 어쩔 수 없잖아요? 덜덜 떨고 있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산옥, 무화과 하나를 까서 팔계에게 내밀면 팔계, 얌전히 그것을 받아먹 는다. 둘을 좇는 차가 시야에서 멀어지면 어느 주차장 구석에 차를 세우 고 산옥에게 입을 맞춘다. 산옥, 얌전히 그것을 받아들인다. 입술이 떨어 지면 빙긋 웃는 산옥.
산옥 이제 화남이 있는 곳으로 가는 건가요?
팔계 네.
산옥 가요. 여기서 거기까지 세 시간 정도 걸리죠?
팔계 네, 최대한 빨리 가면 그 정도 걸릴 거예요. 산옥은 걱정 말고 있어요.
산옥 네.
팔계, 다시 제 자리에 가 운전대를 붙잡으면 산옥, 주변을 다시금 살핀다. 허리춤에 찬 총이 잘 작동되고 있는지 확인하듯 딸깍거리는 것도 잊지 않 는다. 이윽고 그들을 좇는 차가 다시 나타나면 팔계, 액셀을 밟는다.
scene 34. 지하실. 밤.
어두운 지하실. 산옥이 쭈그리고 앉아 있다. 슬그머니 달빛이 비추는 곳 으로 몸을 일으켜 걸어간 그. 천천히 입고 있던 옷을 살짝 벗어젖히면 드 러나는 문신. 화남의 것과 다르게 맥의 문신 위에 형태를 알 수 없는 문 신이 덧대어져 있다. 산옥, 입 안이 쓴 듯 짧게 혀를 찬다.
산옥 개새끼들.
scene 35. 지하실 밤.
아까보다 조금 이른 시각인 것 같지만 여전히 밤이다. 산옥, 모자에 의해 강제로 무릎이 꿇려진다. 누군가에 의해 들린 산옥의 고개. 산옥, 매서운 눈으로 상대를 노려본다.
모자 보스한테 눈 깔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해야 듣냐.
산옥 빠져, 망할 새끼야.
뒷모습만 보이는 보스.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으나 산옥, 짧게 보스 를 향해 침을 뱉으면 꽉 조여지는 목. 간헐적인 기침을 흘리는 그를 보고 도 보스는 아무 반응이 없다.
산옥 보스는 추접스러워요.
모자 적당히 하라고 했다.
산옥 내가 먼저 빠지라고 했지, 이 개새끼가. 쌍으로 사람 갖고 노니까 좋지? 그러려고 날 여기 처 집어넣은 거 아냐. 내 말이 틀려요?
‘철컥’ 소리와 함께 산옥의 관자놀이에 총구가 겨눠진다. 그럴수록 기괴한 웃음을 짓는 산옥. 모자와 보스를 번갈아 보는 그다.
산옥 내가 진짜 돌아버려서 여기에 불 지르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적당히 하 라고요. 못할 것 같은가? 난 할 수 있는데. 다 같이 죽어버리게. 어디, 우 리가 보관하던 LPG가 어디 있더라?
보스에게 발길질을 하는 산옥. 예상치 못한 공격에 보스 고꾸라지면, 산 옥. 총을 쥔 모자 손 역시 발길질한다. 바닥에 나뒹구는 총. 산옥, 그것을 들고 어디론가 가더니 정말 드럼통을 가져온다. 드럼통에 총구를 가져다 대고 방아쇠를 당기려는 산옥. 헐레벌떡 모자가 그를 붙든다. 그러자 더 욱 커지는 산옥의 웃음.
산옥 사랑 같은 소리 하네. 제정신 놓은 것들끼리 참 잘들 논다.
총을 내려놓으려던 산옥, 허리춤에 그것을 차고 유유히 지하실을 빠져나 가려다 우뚝 멈춰 선다.
산옥 나 길바닥에 나앉지 않게 해 준 건 고마운데, 적당히들 하고 삽시다. 다 큰 어른씩이나 돼서는.
모자,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뱉으면 보스, 하지 말라는 듯 손짓만 가볍게 한다. 그는 여전히 뒷모습만 보인다.
scene 36. 산옥의 방. 새벽.
팔계와 산옥이 잠들었다 깨어난 때로 다시 돌아간다. 잠이 깬 산옥, 문득 상 위에 올려진 팔계 지갑을 향해 시선을 옮긴다. 슬금슬금 몸을 일으켜 탁자 위 지갑을 집어든 산옥. 그 안에서 팔계와 화남이 찍은 사진을 발견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오는 팔계의 휴대전화 벨소리. ‘은수’라는 이 름을 확인한 산옥. 천천히 전화를 받는다.
화남 여보세요, 오능?
산옥 안녕하세요, 화남 씨. 처음 뵙겠습니다.
scene 37. 어느 술집. 밤.
화남, 단독으로 맥의 보스를 만난다. 긴장감 가득한 얼굴.
화남 제가 바라는 건 딱 하나예요. 그 애가 편해지는 것 뿐. 부디 저희를 도와 주시면 좋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맥의 보스. 화남을 향해 손짓하면 조심스레 다가가는 화남. 얼마 지나지 않아 소스라치게 놀란 얼굴을 한다. 보스, 고개를 끄덕이면 화남, 망설임 끝에 따라 고개를 끄덕인다.
scene 38. 차 경장의 집. 밤.
차 경장과 화남, 팔계와 산옥이 함께 한 자리에 앉아 있다. 산옥, 망설임 없이 제 어깨를 드러내면 보이는 문신. 그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셋.
차 경장 문신의 의미는?
산옥 놀이 대상?
그 말에 흠칫하는 차 경장과 화남, 팔계와 산옥은 아무렇지 않게 가만히 있다.
팔계 당신은 어떻게 하고 싶나요?
산옥 난 화남 씨를 구하고 싶어요.
차 경장 자칫 나섰다가 염산옥 씨, 당신이 위험해질지도 모릅니다.
산옥 상관없어요. 난 어차피 망가질 대로 다 망가졌거든. 그러면 하나라도 살아 야 하지 않겠어요? 맨정신으로.
산옥, 웃는 얼굴로 화남을 보고 있으면 화남, 미안한지 시선을 피하고 있 다. 그런 그에게 산옥, 손을 잡아준다.
산옥 걱정 말아요. 난 우리 보스 머리를 돌게 만드는 재주가 있거든. 당신 동생 도 있으니 별 일 없을테고.
차 경장 따로 계획이 있는 겁니까?
산옥 아뇨. 전 무대뽀를 좋아해서요.
화남 뭐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산옥 뭔데요?
화남 왜 절 도와주려 하시나요?
산옥 글쎄, 보스 때문에 돌아버린 건 나 하나면 충분할 것 같아서?
산옥, 씩 웃으며 장난스럽게 화남 손을 잡았다 놓는다. 그리고 망설임 없 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산옥 담배 좀 피우고 올게요. 그러면 다들 내일 봅시다.
산옥이 자리를 비키면 팔계, 묘한 얼굴로 그가 나간 문을 응시한다. 이윽 고 들려오는 내레이션.
산옥(N.A.) 망가지는 것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도 나 하나면 충분하다고 그 때 생 각했다. 그 아름다운 사람들의, 내가 감히 가질 수 없는 유대감을 지켜주 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scene 39. 차 안. 밤.
추격전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와중, 산옥. 팔계의 안전벨트를 빼고 급하게 밀어 물속으로 던지다시피 한다. 팔계, 산옥의 이름을 부르지만 산옥은 듣 지 못한 눈치다. 액셀을 밟으며 나아가면 총소리가 들려오고, 창문이 총알 에 의해 깨지기 시작한다. 멈춘 산옥, 어딘가를 향해 총을 겨눈다. 이윽고 셀 수 없는 총소리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