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e Buried Our Karma at Fargo
노바 올가-이바노비치+헬무트 지모 - 말
*노골적이지는 않으나, 살인 및 시체 훼손, 납치에 대한 언급이 등장합니다. 열람에 주의를 요합니다.
We Buried Our Karma at Fargo
(and Never Came Back)
1.
'한겨울의 노스다코타에 타이어체인도 끼지 않은 머스탱을 몰고 다니는 사람은 믿을 놈이 못 된다.'
… 라고 노바 올가-이바노비치는 생각한다. 물론 생각만. 보안관으로서 그의 임무를 논하자면 법질서를 수호하고 억울한 사람이 없게 하는 것인데, 이 생각은 후자에 정확하게 위배되기 때문이다.
배경을 명확히 하자. 여기는 1996년의 노스다코타 주 파고 시, 그 촌 동네를 둘러싼 외곽 순환 도로 중에서도 유독 외진 곳에 위치한 게 죄라 이름 하나 없어 '혈혈단신'이라 불려도 할 말 없는 도로 하나. 파고는 미국의 북쪽 구석에 처박힌 수많은 도시가 그러하듯이 필요 이상으로 지루한 곳이었다. 부모 대신 이웃의 사람을 듬뿍 받고 자라 온전히 제 구실 하는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노바 올가-이바노비치의 입장에서 이는 분명 호재다. 이곳 사람들은 밤에도 문을 걸어 잠그지 않았고, 매해 돌아오는 할로윈에는 천 쪼가리 같은 것을 뒤집어쓴 아이들에게 웃음을 지으며 사탕을 퍼주었으며, 출신 성분에 상관없이 모두를 보듬을 줄 알았다. (옆집의 이사벨라 아줌마가 여름 내내 떠주셨기에) 보풀 관리를 열심히 해줘야 하는 빈티지 스타일의 꽃무늬 스웨터를 입으며, 십 대의 노바는 '내일은 좀 재밌는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이뤄달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 라고 보안관 유니폼을 느슨하게 갖춰 입은 삼십 대 후반의 노바 올가-이바노비치가 답한다.
'혈혈단신' 도로에서 사람 셋이 죽었다. 개중 한 사람은 50대의 국도 순찰관이었고, 둘은 치기 어린 커플로만 보이는 20대 청년들이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이런 데서 죽기에는 조금, 어쩌면 많이, 아쉬운 사람들이고 그랬다. 업무 일지에 쓸 사건사고란 '과속'이나 '음주 운전' 밖에 없는 소박한 동네에서 일어난, 소박하지 못한 살인. 노바는 쓰고 있던 갈색 털모자를 가죽 장갑 낀 손으로 두어 번 벅벅 긁었다. 지금은 법질서를 수호하고 억울한 사람이 없게 할 시간이었으며 …… 놀랍게도 이 수사의 책임자는 자신이었다. (가끔 내 인생조차 제대로 책임지지 못하는 것 같은 때가 있는데 말이지! 그러나 노바는 노스다코타의 캐스 카운티에서 제일 활기 있는 보안관이었고, 그의 윗사람들은 젊은 혈기 하나를 안일하게 과신하는 태평한 족속들이었다.) 노바는 아침 공기에 얼어붙은 베이글을 되새김질하려다 만 자신의 선배에게 말한다. "순찰차는 선배가 보세요. 저쪽(그는 팔을 뻗어 도로에서 벗어난 곳에 고꾸라져 있는 닷지 차저를 가리켰다.)은 제가 볼게요." 그리고 습관이라도 되는 양어깨를 으쓱인 뒤 눈 위를 걸어 현장으로 간다. 하늘이 무너져도 자신이 할 일을 해야 밤에 두 발 뻗고 잘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노바 올가-이바노비치가 바로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여물을 질겅이는 선배를 뒤에 둔 채 한 시간 동안 현장을 관찰했다. 유추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현장으로 가는 길에 도로를 살펴보니 가는 길에 남은 타이어 자국은 세 개고, 지금 눈앞에 보이는 차는 두 대다. (자신이 타고 온 경찰차를 제외하면.) 이로써 노바는 범인의 타이어 자국이 어떤 모양인지 알게 되었으며, 그가 펑펑 눈이 내리는 겨울에도 타이어체인을 끼지 않을 정도로 운전 실력에 자신이 있는 사람이라고 유추했다. 노바는 선배와 대화를 하던 중 이런 불량배에게 어울리는 차량은 머스탱이라고 아주 강하게 주장하였으나, 선배는 차량 폭을 보아하니 시에라가 맞다며 버티고 서서는 물러서지 않았다. 둘은 각자 자신이 옳다는 데에 10달러를 걸었다.
2. 뒤집힌 차량의 안팎으로는 많이 쳐줘야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녀 한 쌍이 널브러져 있었다. 차 안에 있는 여성은 운전대를 잡고 사망한 채였고, 차 밖에 멀리 있는 남성은 등 뒤에서 총을 맞고 앞으로 고꾸라져 사망했다.
2-1. 차가 뒤집어지면서 둘 모두 심하게 다쳤지만, 두 사람이 사망한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다. 노바는 허리를 숙이고 여성과 눈을 맞춘다. 그는 눈을 뜨고 죽었다. 가슴팍에 총을 맞았고, 그 한 방에 즉사했다.
2-2. 눈 위에 남은 발자국을 따라 남자에게 간다. 보폭이 큰 것을 보아하니 남성은 죽기가 싫어 최선을 다해 뛰었다. 그는 뛰다가 정강이에 총을 한 발 맞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 고통을 호소하다 머리에 총을 한 발 맞고 즉사했다.
2-3. 우리의 '머스탱' 소유주는 총기를 다루는데 익숙한 사람이다. 차에서 남성이 누워 있는 자리까지 발자국은 오로지 피해자의 것 하나뿐이다. 노바는 멀찍이 떨어져 발자국을 살폈다. 낯선 발자국은 단 하나. 그 발자국은 무늬가 없으며 자신의 발자국과 크기가 비슷하다. 족히 6피트는 떨어진 차 옆에 서서 뛰고 있는 남성의 다리를 정확하게 맞췄고, 쓰러진 남성의 머리를 정확하게 맞췄다. 그는 용의주도하며, 명사수고, 키는 자신과 비슷하다.
3. 뒤집어진 차의 왼쪽 뒤 타이어에 펑크가 났다. 그게 인위적인지, 자연적인지는 현재로서 알 수가 없다. 자세한 것은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해야겠으나, 여기까지 상황을 파악한 노바는 전자라고 확신한다.
추가 소견: 그는 차의 뒷바퀴를 총으로 쏴 맞춘 뒤, 겁에 질려 눈밭으로 도망가는 피해자의 모습을 관람했다. 하고 많은 곳 중 정강이를 맞춰 그에게 최후의 고통을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피해자가 고통 받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그는 과시적이고, 피해자에게 깊은 원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리라 추측된다.
결론: 파고에 범상치 않은 범죄자가 나타났다.
노바는 쓰고 있던 갈색 털모자를 가죽 장갑 낀 손으로 두어 번 벅벅 긁으며 간 길을 다시 걸어왔다. 순찰차를 다 본 뒤 베이글을 마저 씹고 있던 선배에게 "아, 이거 좀 어렵게 풀릴 것 같은데요." 라고 수더분하게 말했고, 선배는 분명하지 않은 발음으로 "그럼 우리가 더 열심히 하면 되지." 라고 답했다. 노바는 동의의 의사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며 부츠에 묻은 눈을 털었다. '아무리 자신감이 넘쳐도 그렇지, 이 겨울에 타이어체인도 안 찬 건 좀 너무했다.' 라고 생각으로만 툴툴거리며. 경찰차에 탄 뒤 난로를 세게 올린다. 자신이 운전할 차례였다.
0.
그는 무엇 하나 망설이지 않았고 무엇 하나 후회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죽음을 갚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고, 그가 선택한 길이 이 길이었을 뿐이다.'
… 라고 헬무트 지모는 생각한다. 물론 행동 역시. 그러지 않을 이유를 떠올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배경을 명확히 하자. 여기는 1996년의 노스다코타 주 파고 시,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사람들이 사는 그 촌 동네를 둘러싼 외곽 순환 도로 중에서도 유독 외진 곳에 위치한 게 장점이라 범죄의 현장으로 삼기 적절한 도로 하나. 파고는 미국의 북쪽 구석의 처박힌 수많은 도시가 그러하듯이 필요 이상으로 은밀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곳이었다. 복수극의 배경을 찾고 있던 헬무트 지모의 입장에서 이는 분명 호재다. 이곳 사람들은 밤에도 문을 걸어 잠그지 않았고, 한밤중 마을을 나돌아다니는 사람에게 나름의 이유를 부여하며 그의 행동을 대신 합리화할 여유가 있었으며, 출신 성분에 상관없이 모두를 보듬을 줄 알았다. (탄약 냄새가 잔뜩 묻어) 신경 써서 세탁해야 할 것이 뻔한 가죽 코트를 벗으며, 삼십 대의 지모는 '세상에는 이런 곳이 다 있구나'라고 생각한다. 하늘이 무너져도 자신이 할 일을 해야 밤에 두 발 뻗고 잘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헬무트 지모가 바로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그는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없을 법한 도로에서 사람 셋을 죽였다. 개중 한 사람은 50대의 국도 순찰관이었고, 둘은 치기 어리고 혈연을 잘못 타고난 20대 청년들이었다. 자세한 사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그들의 연관성. 그들은 이곳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입고 있던 가죽 장갑을 벗으며 애도라도 비는 양 수돗물에 손을 몇 번 비빈다.
그는 더 이상 억울하지 않았다.
7.
무대는 캐시 카운티 보안관 사무소의 단 하나뿐인 취조실. 테이블 조명 아래 차가운 색의 철제 책상 하나와 등받이 없는 가죽 의자 두 개가 놓여 있다. 책상 위에는 낡은 녹음기가 놓여 있다. 두 의자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 한쪽 의자에는 양손에 수갑을 찬 갈색 머리 남자 하나가 앉아 있다. 남성은 곧게 앉은 채 미동도 하지 않는다. 삐거덕거리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 뒤 백금발의 꽁지머리를 한 여성이 들어와 맞은 편의 의자에 앉는다. 여성은 보안관 유니폼을 느슨하게 입고 있다. 여자가 녹음기의 버튼을 누른다.
노바 이렇게 뵙는 건 또 처음이네요, 그러니까, 지모 씨? 이렇게 불러도 될까요?
(사이.)
노바 묵비권 발휘 가능하시니까 말씀하기 싫으시다면 안 하셔도 돼요. 대신 조서를 쓰는데 본인 의견은 일부 들어가는 편이 좋다는 것만 알아주세요. 그래서, 우리는 간단하게 사실관계만 파악하면 되는 겁니다. 이해하셨나요, 지모 씨?
헬무트 헬무트.
노바 네?
헬무트 헬무트가 더 익숙하다고요.
(사이.)
노바 알겠어요, 헬무트. 그럼 이제 처음 세 번의 살인에 대해서 먼저 확인하겠습니다. 2월 21일 오전 11시에서 새벽 5시 사이에, 당신은 94번 국도에서 총 세 명을 죽였습니다. 차례로 찰스 맥아더, 필 뮬러, 에이미 그레이 씨. 맞습니까?
헬무트 맥아더 씨는 이름을 몰랐네요. 나머지 둘은 맞는 것 같습니다.
노바 왜 그랬습니까?
헬무트 사망에는 애도를 표합니다.
노바 저는 왜 그랬냐고 물었는데요.
헬무트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으니까 그랬습니다.
노바 그럼 그 이유를 말씀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헬무트 확실하게 말씀드리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요.
(사이.)
헬무트 (그는 조곤조곤한 말투로 말한다.) 저는 깨달음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경관님. 저는 제가 한 일의 도덕적 책임을 잘 알고 있어요. 오히려 그걸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여기 있는 거고요. 조서에 이 부분은 꼭 적어주셨으면 좋겠네요.
2.
허허벌판에 딱 하나 있는 도로를 시속 40마일로 달리며, 노바는 코를 훌쩍였다. 선배는 '휴지 건네줄까?'라고 물었고, 노바는 카페에서 들고온 빳빳한 휴지는 사양이라고 답한 뒤 순찰차에서 뭐 특별한 게 나온 건 없냐고 되물었다.
"그러니까 정리해줄게."
선배는 수첩을 꺼내 들면서 말했다. 그리고 가장 나중의 장에 잉크가 유독 자주 번져 손을 흥건히 적시고는 하던 검은 펜으로 적힌 내용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한다.
"차 안에서는 화약 냄새가 안 났어. 도로에 가만히 누여둔 것도 그렇고, 내가 보기에 이 사람은 차 안이 아니라 밖에서 살해당한 거야."
"그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고요."
"그거 말고 다른 게 하나 나왔거든. 이 사람이 순찰 일지 마지막 장에 남겨놓은 글자가 몇 개 있어. 엄청 흘려서 쓴 걸 보아하니 좀 급하게 적은 모양인데, 내 생각에는 운전하면서 적은 것 같거든."
"그건 또 수상하게 구체적인 예측이네요?"
수첩에서 눈을 뗀 선배는 장난스럽게 윙크를 하며 말했다.
"각도가 딱 그래. 내가 순찰 경험이 많잖냐."
"아, 잘났다.“
"아무튼 그래서," 라고 노바의 장난 섞인 비아냥을 가볍게 무시하며 그가 말을 이었다. "운전 중에 쓴 걸로 봤을 때는 분명 긴급 상황 같거든. 그러니까, 우리의 '시에라' 운전자가 우리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죽이려다 목격당한 거야. 여기까지가 내 추론." 그렇게 말하며 선배는 수첩을 덮었다. 선배는 끝까지 운전자가 몰았던 차량을 '시에라'라고 부를 생각인 듯싶었다. 지평선이 구분되지 않아 흰 배경에 검은 도로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풍경만을 반복해서 구경하던 노바 올가-이바노비치는 엑셀을 밟으며 투덜거린다. "가장 중요한 걸 안 말해주셨잖아요. 수첩에 뭐라고 써있었는데요?" 정확하게 무엇이 그에게 거슬렸는지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투다.
"DLR. 세 글자 모두 대문자야. 상황이 상황인지라 차량 번호를 다 못 썼나 봐."
"아하."
"그래서 DLR로 시작하는 시에라를 찾아보려고. 보아하니 아직 못 찾은 것 같던데."
"글쎄요, 머스탱으로 찾아보면 나올 수도 있죠. 그리고 이건 논외인데, 제 생각에는 선배가 놓치고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 같아요."
두 가지 의미를 저울질하며, 노바 올가-이바노비치가 덧붙인다.
"D-L-R. 딜러(Dealer) 번호판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잖아요."
'아-하-'하고 선배는 말을 길게 늘여 답하며 눈을 껌뻑였다. 그렇게 답하니 꼭 진짜 멍청한 사람처럼 들렸다. (노바는 그가 생각보다 명석한 사람인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바는 바람처럼 웃으며 속도를 올린다. 서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었고, 그들의 하루는 이제 막 시작된 참이었기에. 노바는 '이것 봐, 아무리 생각해도 시에라가 아니라 머스탱이 맞다니까요.' 라고 가볍게 덧붙였고, 선배는 '어림도 없어. 시에라야.'라고 가볍게 응수했다. 노바 올가-이바노비치는 실로 눈과 같은 구석이 있는 사람이라, 아무렇지도 않게 뒷방의 생각들을 침대 아래 욱여넣고 매끄러운 표면으로 이를 포장하는 여유까지 부렸다. 추위에 손이 아리는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두텁게 쌓인 눈을 걷어낼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눈 많이 왔다' 같은 피상적 반응뿐.
"눈 많이 왔다."
선배가 말했다.
"그러게요."
노바가 답했다. 둘은 그 뒤로 한참을 말이 없었다.
3.
바실리 카르포프는 자신이 유능해서 바쁜 게 아니라는 걸 알 정도로 자기 객관화에 재능 있는 편이었다. 빌어먹을 촌 동네에는 정육점이 딱 하나 있었고 그 빌어먹을 정육점에는 직원이 단 하나뿐이다. 본인이 바쁘다 한들 그것이 월급의 즉각적인 상승으로 이어지지 않으리라는 것도, 하다못해 평판이 좋아지거나 장사가 더욱 잘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안다. 그러니까, 그는 자신의 근무 태도가 그 어떤 방식으로든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류의 사람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생의 설계도는 단순했다. 그저 그런 생활을 영위하다 겨울이 오면 자주 눈에 파묻히는 이 마을을 무덤 삼아 드러눕는 것을 마지막 사치 삼는 걸로. 바실리 카르포프는 소박한 사람이었다.
손님이 찾아왔다. 진눈깨비가 오던 날의 일이다. 날이 어두워 반투명 코팅된 문 너머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붉은 실로 '어서오세요'라고 수 놓인 현관 매트 위에 질퍽이는 눈과 비의 혼합물이 묻은 것을 기억한다. 손님은 문에는 '영업중'이라는 푯말이 걸려 있음에도 창문을 두 번 가볍게 두드렸고, 답이 돌아오지 않자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계십니까?"
이국의 억양이었다. 그쯤의 바실리는 귀찮게 구는 외지인이 한 명 늘었다고 생각했기에 자리에서 다 일어나기도 전에 한숨을 내쉬는 일이 먼저였고, 실내용 슬리퍼를 바닥에 질질 끌며 가게 문을 열었다.
"그냥 들어오쇼."
역시 이국의 억양으로 바실리가 답했다. 손님은 입꼬리를 올려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짓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꼭 흰 풍경에 찍힌 마침표 같은 차림이었다 ─ 두툼한 가죽 코트, 검은 가죽 장갑, 그 안에는 부드러운 재질의 검은 목폴라와 검은색 청바지. 그리고는 발에 못 박히기라도 한 양 거기 서서 움직이지도 않았다. 뒤따르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자 바실리는 다시 자신의 자리에 앉으려던 움직임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그는 정말 아직도 거기 찍혀 있었다. 바실리는 한쪽 눈썹을 올렸다가 내린 뒤, 손님이 가지고 있을 또 다른 용건이나 이유를 생각한다. 아무것도 없는 손만 만지작거리며 생각을 정리한다. 바실리 카르포프는 소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 불청객이 현관에 서서 자신의 영업을 방해하고 있는 이유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안 들어오고 뭐 합니까?"
현관 매트는 물을 잔뜩 빨아들여 축축하게 젖는다. '거기 계속 그러고 있을 거요? 비 들어오는데?' 바실리는 그 나이대의 노인처럼 툴툴거림을 덧붙인다. 용건이라도 말하라는 채근이나 다름없었으나, 사내는 요지부동으로 거기 서서 계속 자신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 눈빛은 왠지 모르게 날이 서 있으며 이상한 종류의 경이가 섞여 있다. 그는 정말 아직도 거기 찍혀 있었다. 그쯤 되면 바실리는 헛숨을 내쉬며 혀를 차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고기는 확실히 용건이 아닌 것 같고. 그렇다면 자신한테 볼 일이 있다는 의미인데, 이쯤 되면 무방비한 상태의 노인을 총으로 쏴 죽이고도 남았을 시간이란 말이지. 게다가 남자의 옷차림을 보아하니 그 아래 총기를 숨기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바실리 카르포프는 소박한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그걸 파악하는데 전문가의 눈썰미가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그는 연륜이라는 게 있어 척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편이었다.
"그럼 그냥 거기 서 계시던가. 나도 할 일이 있는 사람입디다."
그는 서 있기를 포기하고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는 정말 아직도 거기 덩그러니 찍혀 있었다. 단지 자신의 행동을 바라보기 위해 고개의 각도를 조금 틀었을 뿐이다. 사내는 이제 자신의 눈에 충분히 익었다. 그는 이제 좀 다른 사실들을 알 수 있었다. 이를테면 그의 가죽 코트 표면을 타고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으나 그의 머리는 물기 하나 없이 건조하다는 사실이나, 그는 자신을 지켜보는 내내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있다는 (아마 그래서 그가 훨씬 기묘한 사람처럼 느껴지는 걸지도 모른다.) 사실, 혹은 그가 신고 있는 검은색 가죽 신발은 그 밑창이 수상할 정도로 매끔해 종류를 파악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바실리 카르포프는 소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어떤 사유로 그런 종류의 신발을 신고 다니는지 알고 있다. 그리고 입을 연다.
"불만이 있으면 말을 하셔야 알아듣지."
사내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진다. 그를 오래 들여다봤기에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바실리는 이제 그의 눈빛에 섞인 그 날카로운 것이 뭔지 알 것 같았다.
"당신은 정말 기억 못 하시는군요."
아주 깊은 곳에서 아주 많은 것을 비집고 나온 목소리가 말한다. 그것은 증오 섞인 경멸이다. 바실리 카르포프는 정말 소박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저 그런 생활을 영위하다 겨울이 오면 자주 눈에 파묻히는 이 마을을 무덤 삼아 드러눕는 것을 마지막 사치 삼았다. 그 뒤로는 정말 그의 말처럼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못한다.
8.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건조한 정적 사이로 녹음기 테이프 돌아가는 소리만이 들리는 가운데, 여자는 초조하게 책상을 손끝으로 몇 번 두드린다.
노바 그럼 두 번째 살인에 대해서 확인하겠습니다. 2월 22일 오후 8시 30분경, 당신은 피해자 소유의 잡화점에서 바실리 카르포프 씨를 죽였습니다. 맞습니까?
헬무트 맞습니다.
노바 왜 그랬습니까?
(사이.)
노바 절차상 물어봐야 하는 질문이니, 방금처럼 묵비권을 행사하고 싶으시다면 그러셔도 됩니다.
헬무트 혹시 테이프에 녹음된 내용은 문서화됩니까?
노바 (한 박자 늦게) 네?
헬무트 테이프에 녹음된 내용이 문서화되냐고 물었습니다. 기록으로 남아서 저장되냐고요.
노바 파일 원본이 저장되는 건 아니지만, 답변 중 조서에 참고할 수 있거나 특기할 만한 사항은 기록되겠죠.
헬무트 조서는 몇 년이나 저장됩니까?
노바 (입을 열었다가 인상을 찌푸린다.) 글쎄요? 그래도 기록이니까 충분히 오래? 파고 시에 이만큼 살인 사건이 단발적으로 자주 일어난 것도 처음이라 꽤 오래 화자되겠죠. 아마도.
헬무트 바실리 카르포프는 내 가족의 원수입니다. 그가 전과자라는 건 알고 계시겠지요.
노바 '형을 다 살고 나온' 전과자죠. 헬무트, 혹시나 이 사건을 법정 공방으로 끌고 가실까 봐 미리 조언해드리는 건데, 미국 헌법이 자경주의에 아무리 관대하다고 해도 살인까지 덮어줄 수는 없어요. 그리고 방금 자백까지 하셨는데 그걸 왜 …….
헬무트 (이름표를 읽으며) 이바노비치 경관.
(사이.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여자는 잠깐 굳는다.)
헬무트 난 분명 깨달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말했습니다. 아량이 넓은 건 알겠는데, 좀 접어두세요.
노바 정말 … (노바는 녹음의 버튼을 누른다. 딸깍거리는 소리와 함께 녹음기 돌아가는 소리가 멈춘다. 잠깐 사이.)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신데요, 헬무트, 당신은 나한테 훈수를 둘 처지가 아니에요. 애도를 표한다고 말씀하셨으면 그냥 그 빌어먹을 애도나 표하세요. 당신이 엮인 살인만 다섯 건입니다. 알아요? 아시겠죠, 보아하니 깨달음이 필요하시지 않은 모양이니까 …….
헬무트 그게 당신이 날 유리하는 방법입니까?
노바 네?
헬무트 그게 당신이 날 유리하는 방법이라고 물었습니다. 보아하니 이 마을 사람들은 다 똑같은 방법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습관이 있네요.
노바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헬무트 무슨 말이긴, 이 빌어먹을 파고에서 본인 행동에 책임을 질 배짱이 있는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다는 소리지. (잠깐 사이.) 당신들은 다 거짓말쟁이야.
노바 이봐, 당신이 오기까지 여긴 아무 문제 없었어. 살인 사건은 무슨, 하루에 주차 위반 딱지 하나 끊으면 하루 업무가 끝나는 곳이었는데 당신이 나타나서는 사람 다섯을 죽였다고. 뭘 그렇게 잘했다고 도덕적으로 우월한 척을 하는 건데? 당신이 그렇게 잘났어?
4.
'뮬러' 중고차 거래소 현관 앞에서 노바와 선배는 가위바위보를 했다. (그건 누가 부고를 전할지 결정하는 파고 시 보안관 사무소의 아주 오래된 전통이었다.) 그리고 대략 2분 43초간의 장렬한 협상과 실랑이를 거쳐, 결국 현관문을 두드리는 건 노바 올가-이바노비치의 몫이 되었다. 노바는 헛기침을 하며 오늘 자신이 낸 목소리 중 가장 상냥하며 위협적이지 않은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했다. 선배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잇새로 흘렸고, 노바가 그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한 번 째려보자 역시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문은 금방 열렸다.
"무슨 일이죠?"
노바는 현관문을 열고 나온 사람을 너무 잘 알았다. 알프레드 뮬러는 이 촌 동네에 단 하나뿐인 중고차 거래소에서 일하는 단 하나뿐인 직원이었다. 면허가 있고 차를 몰 줄 아는 파고의 모든 주민은 그에게서 차를 샀고, 노바 역시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몸집이 작아 쉽사리 애처로워 보였고 겁에 질리지 않았음에도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노바는 남몰래 혀를 몇 번 찰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 다들 부고 소식을 전하는 걸 꺼리는 거였다. 현관에 서 있는 공권력들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 불운을 몰고 다니는 골칫덩어리 취급을 받기 마련이기에. 작은 체구의 남자는 벌써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게 지난 밤 동안 스스로를 겁에 절인 모양이었다.
"아드님 소식인데요 ……."
노바는 그새 건조하게 마른 입술 위를 물었다 놓았다.
"어젯밤 94번 국도에서 발견되셨어요.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노바는 쓰고 있던 털모자를 벗으며 느슨하게 경례했고 선배 역시 자신을 따랐다. 알프레드는 간헐적으로 비명을 내지르며 금방이라도 바닥으로 무너질 것 같은 표정을 지었는데, 둘은 모두 그가 그러지 않았다는 것에 묘한 안도감을 느낀다. 앞으로 전달할 소식은 작금의 발언보다 파괴력이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바는 모자의 챙을 쥐어 뜯으며 한참을 생각한다. 다음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우선 당신의 아들이 살해당했다는 얘기를 먼저 해야 할 거다. 그래야 자연스럽게 수사 협조 요청에 대한 얘기를 꺼낼 수 있을 테니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비명은 조금씩 말의 모양을 잡아가기 시작한다. '누가'나 '왜' 같은 단어들이 두루뭉술하게 혀 끝에서 튀어나오고, 몇 번 더듬거리며 문장의 형태가 깎아지기를 다하면 노바는 그제서야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누가 그랬습니까? 누가 걜 ……."
"저희도 지금 파악 중에 있습니다. 그래서 부탁드리는 건데요, 혹시 지난 주 동안 매장에서 도난당한 차가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네?"
알프레드의 겁에 질린 목소리가 물음표를 그리며 날카롭게 공기를 가른다.
"매일 재고 조사하시잖아요. 차가 그렇게 많지도 않고요. 아무래도 사건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여쭤보는 겁니다. 혹시 마음 정리에 시간이 좀 필요하시다면 저희가 충분히 기다려드릴 수가 있으니까요, 너무 부담가지지 마시고 천천히 하셔도 ……."
"재고 조사는 안 하지만 알 수 있는데요, 내가 알죠, 내가 여기 주인이니까. 그 차는 우리 차가 아닌 것 같아요."
"네, 물론 그러고 계시는 거 알고 계시죠. 그렇지만, 장부라도 보여주셔서 확인을 도와주신다거나 하면 저희가 차종이라도 파악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아가씨."
노바는 그쯤에서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여전히 하얗게 겁에 질린 얼굴 위에 몇 겹의 감정을 억지로 덧그린 채 영업용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눈썹을 찡그리려는 걸 겨우 참았다. 알프레드 뮬러의 목소리는 제자리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이미 대답을 했잖아요, 그렇죠?"
노바는 안다. 부모 대신 이웃의 사람을 듬뿍 받고 자라 온전히 제 구실 하는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노바 올가-이바노비치는 알 수 있다. 우리 주변의 가장 간악한 이웃은 가장 연약한 자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밤에도 열린 문을 열고 들어와 우리의 침대 아래서 잠을 잤고, 매해 할로윈에는 천 쪼가리 같은 것을 뒤집어쓴 아이인 척하며 자신의 몫이 아닌 사탕을 챙겼으며, 그럴 가치가 없음에도 보살핌을 받았다. 노바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침묵이 주는 긴장감을 음미하다 금방 허리를 바로 했다.
"죄송하지만, 뭐라고요?"
"난 이미 대답을 했다고요. 협조하고 있잖아요. 누가 내 아들을 죽였는지 나도 알고 싶은데, 그러니까 …"
그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노바는 그 침묵이 가지는 무게를 알고 있는 사람이다. 이제는 노바의 차례다.
"마음이 복잡하신 건 알겠습니다, 뮬러 씨. 그렇지만 전 아직 아드님이 살해당했다는 얘기는 안 꺼냈는데요? 어떻게 아셨어요?"
"아니, 나는, 그러니까 싸우려는 게 아니에요!"
알프레드 뮬러는 언성을 높인 뒤 갑자기 사무실 안으로 사라졌다. 노바와 선배가 대충 아무말도 하지 않고 '왜 저래?'라는 의미의 눈빛을 주고 받는 동안 그는 코트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이러면 됩니까? 아들 잃은 아비한테 이렇게까지 하면 좋아요? 다 세고 오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연약하기 그지없었으며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그의 수동 공격은 더 이상 둘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노바는 로버트의 이름을 몇 번 부르며 진정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그를 몇 번 타일렀다. 그러나 알프레드 뮬러는 막무가내였다. 그는 마치 분노한 생쥐마냥 좁은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며 저 너머로 자취를 감췄다. 입 벌리고 그 광경을 보고 있기만 하던 선배는 다시 털모자를 뒤집어쓰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구리지?"
"엄청 구려요."
노바는 굳게 닫힌 현관의 문에 기대며 생각한다. '좋은' 사람이라면 으레 그러하듯, 자신의 선택을 재고한다. 어쩌면 알프레드 뮬러는 정말 그냥 겁에 질린 거였을지도 모른다. 그를 몰아붙이는 건 좋지 않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는 형편없는 거짓말쟁이인 게 아니라 그저 겁에 질린 아버지였을지도 모른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쉽사리 최악을 생각하지 않던가 ……. 가정은 몸을 불리고 불리고 불려서 그를 좀먹기 시작한다. 아, 어쩌면 이런 형편 없는 균형 잡기도 그만둬야 할지도 모른다. ('모른다'로 끝나는 생각 좀 그만해, 노바!) 대부분의 사람이 스웨터에 뚫린 구멍이 작다면 모른 척 눈 감고 하루만 입어 버릇 하는 것처럼, 그 작은 의심을 그냥 덮어두고 그에게 동정의 의사를 표하면 됐을 일이다. 그러나 스웨터에 뚫린 그 작은 구멍을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늘이 무너져도 자신이 할 일을 해야 밤에 두 발 뻗고 잘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노바 올가-이바노비치가 바로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선배는 자신의 맞은편에서 눈 내린 풍경을 바라보다 인상을 찌푸린다. 그리고 또 한 번 나지막하게 말했다.
"노바, 저거 뮬러 씨 아냐?"
말을 들은 노바는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네?'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한 마디와 함께 눈을 몇 번 깜빡이면 눈앞의 광경이 느릿느릿하게 이해되기 시작한다. 알프레드 뮬러는 검은색 머스탱을 몰고 급하게 뒷길을 이용해 거래소 앞 국도로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그래서 얻게 된 오늘의 결론: 깊은 생각은 생산적인 일에 도통 도움이 되지 않는다.) 수사의 참고인/증인/유가족/용의자는 둘의 눈앞에서 유유히 도망가고 있었다. 그것도 당당하게 뒷문으로 차를 타고! '미쳤나 봐, 진짜 또라이네!' 노바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뭐해요, 안 쫓아가고!"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무실 앞에 있는 경찰차에 올라탄다. 운전대는 또 한 번 노바의 차지가 되었으나, 누가 뭐래도 둘 중 운전 실력이 그나마 더 나은 쪽은 가장 활기 있는 노바였으므로 아무도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노바는 지평선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머스탱을 보며 '저 미친놈이!'라는 욕지거리를 중얼거리기를 계속한다.
'역시 한겨울의 노스다코타에 타이어체인도 끼지 않은 머스탱을 몰고 다니는 사람은 믿을 놈이 못 되는 게 분명해.'
… 라고 노바 올가-이바노비치는 다시 한 번 생각했다.
9.
헬무트 살인이 다섯 건이라고 했나? 그럼 하나 남았네. 마지막 살인에 대해서 말해보라고, 경관.
노바 당신은 바실리를 죽이고 아주 오래 자리를 뜨지 않았어.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렸지. 맞아?
헬무트 내가 그 부분을 물어보는 것 같아?
노바 물어보는 부분은 내가 결정해.
헬무트 하!
노바 당신은 정육점에 있는 육절기로 시체를 훼손했고. 그가 가게 어딘가에 호신용으로 두고 있었던 엽총을 찾아내 가게로 찾아온 뮬러를 조준했어.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지.
(사이.)
노바 맞아?
헬무트 호신용이 아니었어.
노바 뭐라고?
헬무트 호신용이 아니었다고. 그 사람 뒤가 얼마나 구린지 알아? 당신들은 2년 전 갑자기 나타난 정육점 주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 사람이 왜 여기로 이사를 왔겠어? 이 동네가 뭐가 좋다고.
노바 말조심해.
헬무트 나는 틀린 질문에는 대답을 하지 않겠어.
(사이.)
헬무트 그러니 이번에는 내가 다시 묻지.
5.
국도를 달리던 머스탱이 정육점 간판이 꽂힌 샛길 앞에서 급하게 꺾였을 때, 선배는 조수석에서 저 인간이 정육점에 가는 것 같다고 삿대질을 해댔다. 노바는 역시 전방을 주시한 채 목소리를 높이며 '알아요, 나한테도 보인다고!' 라고 대답했다. 머스탱이 무게 중심을 잃어 반쯤 미끄러지는 광경을 보며 둘은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과속부터 시작해서, 아마 알프레드 뮬러가 어긴 교통 법규의 수를 세다면 분명 캐스 카운티 보안관 사무소의 신기록이 수립될 게 분명했다. 노바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차의 기어를 바꾸며 핸들을 꺾었다. 정확하게 설명하기는 힘든 일련의 동작은 오랜 감에서 비롯되었다. 차의 무게 중심이 부드럽게 앞으로 쏠린다. 경찰차의 뒤꽁무니가 매끄러운 곡선을 그리며 90도를 돌았을 무렵, 노바는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다시 차의 기어를 바꾼다. 안정적인 승차감이었다. 손잡이를 꼭 잡고 있던 선배는 좀 인상 깊다는 눈빛을 보냈고, 노바는 굳이 옆을 돌아보지 않아도 그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샛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정육점 건물 앞에 비뚤게 주차된 머스탱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옆에는 대조적으로 반듯하게 주차된 황갈색 시에라가 있었다. 그게 누구 소유의 차인지 노바와 선배 모두 알 수 있었다. 선배가 옳았다. 아마 노바는 그때부터 모든 게 조금씩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뮬러 씨!"
차 문을 열며 냅다 소리를 지른 건 노바 쪽이었고, 차문을 열며 홀스터에 잘 들어있던 권총을 꺼낸 뒤 안전장치를 해제한 건 선배 쪽이었다. 차 문이 양쪽에서 부서져라 닫히는 동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결국에는 노바 역시 자신의 리볼버를 꺼내 들고 안전장치를 해제했다. 둘은 철저하게 훈련 받은 경찰이었다. 더 이상 큰 소리를 내는 건 자신들의 위치를 노출하는 꼴 밖에 되지 않았으니, 둘은 조용한 수신호를 사용해 대화하기로 결정했다. 선배는 손가락으로 머스탱서부터 가게 현관까지 쭉 연결된 발자국을 가리키며 말했다. 가게 안쪽은 자신이 둘러보겠다고. 발자국은 뜀박질 때문에 보폭이 넓었고, 공포 때문에 죄다 비틀려 있었다. 노바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럼 뒷문으로 돌아 들어가 도주로를 차단하는 건 자신이 하겠다고. 경찰차에서 시작된 두 개의 발자국이 일정하게 부득거리는 소리만을 내며 자신의 갈 길을 간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서로의 행운을 빈다. 훈련 상황이 아닌 실제 대치 상황은 둘 모두 오랜만이었다.
차가운 공기에 어디서 묻었는지 모를 비릿한 피 냄새가 섞인다. 노바는 알고 있다. 정육점 뒤편의 호수 위로는 죄다 산이었다. 알프레드 뮬러가 마음먹고 그 위로 뜀박질 해 도망간다면 파고 시의 보안관들을 총동원해도 찾는 건 무리일 테다. 그러니 삭풍이 살결을 할퀴어도, 노바는 자신의 감각을 곧추세운다. 그는 보이지 않는 선을 긋고 배수진을 쳤다. 여기서 조금만 삐끗하거나 속아 넘어가면 그 뒤로는 죄다 낭떠러지라고. 절박함은 늘 그의 가장 날카로운 무기가 되었다.
"이봐, 응? 나도 당신이 화가 많이 난 건 알고 있어. 그렇지만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
노바는 정육점 건물 밖에 놓여 있던 장작더미에 몸을 숨겼다. 몸을 잔뜩 낮춰 그 너머를 바라본다. 알프레든 뮬러가 한 남자 ─ 모든 것을 등지고 있어서, 보이는 것은 오직 검은색밖에 없는 남자다 ─ 앞에 무릎을 꿇고 싹싹 빌고 있는 걸 보아하니, 우위를 쥔 쪽은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그 사람은 …… 그 남성은 정말 거기 까만 점처럼 찍혀 있었다.
"당신들도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지. 난 이제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이번이랑은 경우가 다르지! 우린 그때 그저 미숙했던 거였어!"
"그게 변명이야? 당신들이 미숙한 남치범이었다는 게?"
이국의 억양이 묻은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운 동시에 까끌거린다. 질문을 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다. 노바는 어쩌다가 그의 목소리가 그런 질감을 가지게 되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이봐 ……. 지금 집사람이 검은 옷을 입고 애 장례식을 준비하고 있어. 당신이 우리 아들을 데려갔잖아. 그거면 충분하지 않아?"
"당신이 죽인 내 가족은 세 명이야. 난 아직 하나밖에 안 건드렸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잘 생각해 봐. 응? 거기서 관이 하나 늘었다면 얼마나 속상했겠어. 안 그래? 당신도 알잖아, 우리 집사람이 얼마나 슬퍼하겠나 ……."
"잘 모르겠는데,"
고작 거기까지만 대화를 들은 노바도 알프레드 뮬러가 얼마나 설득에 재능이 없는지 알 수 있었다. 노바는 타이밍 맞춰 남자의 말을 끊으며 외쳤다.
"경찰이다, 손들어!"
("당신들이 내 가족을 전부 죽였잖아.")
온통 하얀 설원을 배경으로, 풍경이 찬찬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남자는 2연발 엽총을 들고 알프레드 뮬러의 머리를 정확하게 겨누고 있었는데, 그 폼이 완벽해 노바는 자신의 리볼버를 고쳐 쥘 수밖에 없었다. 뮬러는 빠릿하게도 손을 들었고 의심이 조금 섞여 불안하고 초조한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기만 했다. 노바가 성큼성큼 거리를 좁힌다. 발밑의 눈은 부득거리는 소리를 내며 꾹꾹 눌려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동안 남자는 총을 내려놓지도 않고 있었다. 그는 그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느릿느릿하게. 시선이 있던 곳에 자신이 아주 오래 갈망해온 무언가가 있어서, 차마 거기서 눈을 뗄 수 없는 사람마냥.
"총 내려놔."
소리치지 않아도 서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리다. 마침내 노바는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때 알프레드 뮬러가 슬금슬금 무릎으로 기어가며 적당히 거리를 벌리고 있었나? 그것도 아니라면 벌떡 일어나서 호수 너머로 한창 뛰어가며 도주하고 있었나? 어떤 서술을 적어도 정확하지 않을 것이다. 노바의 눈에는 오로지 남자의 얼굴만이 들어왔고, 나머지는 다 성에라도 낀 듯 뿌예 보였기 때문이다. 그제서야 노바는 알게 되었다. 남자의 머리칼은 검은색이 아니라 밝은 갈색에 가깝다. 그는 아직도 2연발 엽총을 손에서 내려놓지 않은 채였고, 신기하게도 어디 하나 젖지 않은 채였다.
그는 평범하다 못해 선량해 보였다. 선량하다 못해 슬퍼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왜인지, 오히려 노바 올가-이바노비치의 마음 한구석을 젖게 햇다.
자신도 누군가의 눈에는 저렇게 보일까? 어두운 머리칼을 하고, 깔끔하고 무엇하나 고장 나지 않은 것 같은 얼굴을 했지만 거기 (검은 점으로나마 찍혀서) 존재하는 게 다행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부서지기 직전의 눈빛을 하고 있을까? 노바는 남자의 머리를 겨눈 총구를 내려놓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고작 그런 것에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한 사람이었고, 그건 남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천천히 입을 열고 말한다. 그리고 정중하기 짝이 없는 말투로 제안했다.
"저 사람이 제 가족을 납치해 실수로 죽였다는데요. 혹시 저에게도 실수로 저 사람한테 총 한 번 쏴볼 기회를 주실 수 있으십니까? 당신은 그래도 사리 분별이 잘 되는 사람처럼 보여서 여쭤보는 겁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범상치 않은 범죄자였다.
10.
헬무트 그건 그냥 내가 던진 도박이었어. 굳이 나한테 기회를 줄 필요는 없었다고. 그렇지만 당신은 나한테 기회를 줬어.
(사이.)
헬무트 왜 그랬지?
노바 당신은 이 마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 이 마을에 와서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어. 나한테는 보안관이 되거나 운전에 관심이 생길 이유가 분명하단 말야.
헬무트 누가 죽였어?
노바 하!
헬무트 난 누가 당신 가족을 죽였냐고 물었어.
노바 이제 와서?
헬무트 그래, 이제 와서.
노바 글쎄, 고장 난 타이어체인? 아니면 눈이 많이 와서 미끄러웠던 눈길?
(사이.)
노바 당신은 원망할 대상이 실존하고 분명하다는데 감사해야 해. 그건 장점이 될 수 있는데, 당신은 그걸 그렇게 써먹었다고. 고작 그렇게!
(사이.)
노바 난 당신을 이해해서 당신한테 기회를 준 게 아냐. 당신이 뭐, 불쌍하다거나 그래서 그런 것도 아냐. (잠깐 사이.) 그냥 … 당신한테는 총으로 맞혀서 쏠 수 있는 대상이 있었을 뿐이고, 나한테는 없었을 뿐이야. 그래서 나는 내 가족을 죽인 것들에 대해 할 수 있는 게 고작 이것밖에 없어.
6.
달리는 목표물을 맞히는 것은 그의 습관에 가깝다. 이는 겁에 질려 달아나는 상대의 행동을 관찰하는 것이 그에게 흥미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인데, 이는 학문적 호기심보다 순전한 궁금증에 기반했다.
가족이 납치를 당한 이유는 비교적 단순했다고 경찰이 일러줬다. 그의 집안은 빌어먹게도 돈이 많았고, 그 사실이 외부로 새어 나갈 정도로 주변 환경이 느슨했으며, 그럼에도 그는 소박한 생활을 유지하고 있어 접근성이 좋았기 때문에 범죄의 대상이 된 거라고. 그들은 며칠씩이나 자신의 집을 점거해 거기 눌러앉았다. 그곳의 주인인양 냉장고를 열어 음식을 꺼내먹었고, 케이블 채널을 구경하며 리모콘의 버튼을 눌렀다. 겁에 질린 그의 가족이 며칠을 책상다리에 묶인 채 짓눌려서 앓는 동안 자신은 멀리 파병을 다녀오느라 제대로 연락을 주고받지도 못했다. 그들은 미숙했고, 성질이 급했으며, 그렇게 여유 있지 않았다. 3일째 되는 날 밖에서 금이 가 깨진 발코니 창문을 발견한 이웃이 경찰에 전화를 걸었다. 그들은 멀리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를 듣고 통장 사본이나 귀중품 같은 것들을 챙긴 뒤 도주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건 자신의 가족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작 총성 세 발이었다. 경찰은 소리를 듣고 집안으로 뛰쳐들어갔으나 때는 이미 늦었었다.
전부 현관에 서 있던 경찰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해준 이야기다. '저, 죄송하지만 그래서 자택이 사건 현장이 되셔서 출입이 불가능하신데요.' 그가 덧붙인다.
"혹시 머물 곳이 있으십니까? 없다면 저희 쪽에서 ……."
재앙과 같은 경험은 사람을 무디게 만든다. 그 뒤로 아무 말도 듣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2연발 엽총은 가늠쇠가 작아 오로지 감에 의해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 그는 숨을 참고 정확한 곳에 총구를 조준한다. 아마 그의 가족도 저만큼 공포에 떨었을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끌어안느라 바빠 다가오는 죽음을 마주하지 못했다 전해 들었으니까. 나는 그래서 당신이 좀 더 빠르게 뛰었으면 한다. 더 힘차게 뛰었으면 한다. 그래서 당신이 숨이 넘어가기 직전 죽음과 유사한 고통을 느꼈으면 좋겠다. 그리고 혹여나 남몰래 안도했으면 한다. 뒤를 돌아볼 여유가 생겼으면, 그래서 흐릿하게만 보이던 내가 어떤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죽기 전 알았으면 좋겠다.
점점 느리게 멀어지는 점을 바라본다.
그는 방아쇠를 당기는데 망설이지 않았다.
∞.
노바 그래서 난 도통 당신을 이해할 수 없어.
(사이.)
노바 난 당신을 이해하지 않을 거야.
여자는 서술인지 다짐인지 분명하지 않은 것을 웅얼거린다. 둘 모두 아무 말 하지 않는다. 무엇 하나 단정해서 말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으므로, 둘은 마냥 지쳐 보인다. 여자는 아직 수갑을 차고 곧게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본다. 시선이 짧게 마주하다가도 금방 엇갈린다. 여자는 눈 돌려 취조실을 나간다. 캐시 카운티 보안관 사무소를 박차고 나가, 펑펑 내리는 함박눈을 온몸으로 맞는다. 꾹꾹 밟아 남긴 발자국 위로 금방 눈이 덮여 여자의 흔적은 금방 지워진다. 그는 꼭 그곳에 없었던 사람이 된다.
취조실에는 아직도 남자가 앉아 있다.
그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막연한 무언가를 한참 기다리기만 한다.
(막.)